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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평정작전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가 집필한《풍림화산, 신슈 제압 - 다케다 신겐, 젊은 날의 고투苦鬪와 차질》를 번역한 것으로. 1541년 아버지를 내쫓고 가이甲斐 지방의 영주가 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당시의 이름은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이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땅을 침공하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기까지(즉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대립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벌인 십 수년간의 경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 1차 사쿠佐久 침공과 카미이나上伊那에서의 공방

  우에하라 성上原城에 상주시킨 이타가키 부대板垣衆의 재편성을 마치고, 시모미야 성下宮城의 건축이 시작되면서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의 스와諏訪 영지 처리는 일단 완결이 지어졌다. 이 시점에서 전략적으로 타당한 침공 목표는 카미이나 군上伊那郡의 反 다케다 세력, 즉 타카토오 요리쓰구高遠賴繼와 그에 동조하는 일당들이 될 것이다.

  그들을 일소하고 카미이나 군을 제압하는 건, 다케다 가문의 스와 군 지배를 보다 공고히 하게 할 것이며, 치쿠마 군筑摩郡에 거주하는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小笠原 총령가와 시모이나下伊那에 할거한 그 지족(支族, 역주 : 일가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혈족)들을 분단시킬 수 있게 된다. 오가사와라 총령가의 세력권은 스와와 인접하여, 머지않아 적대하게 될 것이 자명하였고, 그런 이상 기선을 제압해 굴복시켜야 할 상대였다. 그리고 전력집중의 원칙에서 생각해도, 사쿠 군佐久郡이라는 통일적 지배자를 가지지 못한 "그레이존" 에 의해 측면을 방어할 필요가 없는 카미이나 이상의 목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노부와 중신들은 보다 약체의 적을 찾아 침공 정면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다케다군의 창 끝이 향한 곳은 가이甲斐 본령이나 스와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진 않을, 노부토라 정권 최말기에 평정한 사쿠 / 치이사카타小縣 2군이었다.

  텐분 12년(1543) 9월 9일 츠츠지가사키 저택躑躅ヶ崎館을 출발한 하루노부는, 12일에 우미노구치海ノ口 / 15일에는 미야노우에宮ノ上 / 16일에는 마에야마前山로 진출하여 약 5일만에 사쿠 군을 종단, 17일에 오오이 코다이(大井高台, 光台라고도 함, 쿄부쇼유 사다타카刑部小輔貞隆)가 농성해 있는 치이사카타 군의 나가쿠보 성長窪城을 포위했다. 강적을 피하여 약한 적을 철저히 때려눕히고, 후방을 차단하여 적을 분단시킨 후 고립된 적을 각개격파하는 하루노부의 전술은, 군사적 부담을 가능한 한 국한하고 싶은 중신들에 있어선 극히 편리한 것이었다.

  나가쿠보 공격은 신시(申刻, 오후 3시~5시)에 시작되었으나 급히 진격하여 불의를 찌른 것 치고는 진격이 느려, 19일에야 드디어 성을 함락시켜 오오이 코다이를 생포했다. 21일에는 오오이 편에 선 모치즈키 일족望月一族들을 처형하고, 코마이 코하쿠사이駒井高白齋들에게 코다이를 호송하여 먼저 보낸 하루노부는, 군대를 이끌고 잔류하여 그 부근을 제압, 거의 사쿠 군의 지배를 회복한 후 10월 1일 후츄로 돌아왔다.

  이 전격적 침공은, 하루에 36개 성을 함락시킨 텐분 9년(1540) 5월의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활약을 방불케하는 것이었으나, 가이 최대의 도자마 호족인 오야마다 데와노카미 노부아리小山田出羽守信有가 이끄는 군나이 부대郡內衆 등은 이 원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 같아, 반드시 작전 내용에 어울리는 충분한 병력을 투입한 건 아니었다. 오오이 일족을 노려 저격하고, 여기에 직접 가담한 모치즈키 일족을 제거하였을 뿐, 대부분의 영주들은 저항할 힘을 온존시킨 채로 내버려둔 것이다. 이 점에서, 철저한 제압전으로 저항력을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해 사쿠 군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낸 노부토라와는 전략상의 위치 부여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과도한 군역을 부과하다 추방당하고 만 노부토라이지만, 총체적인 부담은 영지의 확대라는 형태로 그 때마다 환원되었고, 단기적인 개개의 부담 증가에 의해 일어나는 반발만 무마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안정된 성장을 지속하는 건 가능할 터였다. 노부토라 시대의 다케다 가문 야전병력은 기본적으로 획득한 땅의 증대에 비례하여 점점 더 증대해가고 있었다.

  거기에 비해 단기적인 부담을 경감해주려고 한 하루노부의 전략은, 오히려 장기적인 군역부담을 증가시키고, 이를 호도하기 위해 일부 장병들을 성주 대리城代라든가, 성 수비병城番衆이라는 형태로 점령지에 상주시켜야만 했기에 기동적인 야전병력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급격한 성장 후에 오랜 정체기간이 계속되는 효율 나쁜 일진일퇴의 영지 확대였다. 스와 / 이나 방면과 사쿠로 번갈아 침공하는 하루노부 정권의 병진책은, 병력의 분산투입이라는 2 정면작전의 전형적인 폐해를 낳은 것이다.

  얼마 안 가, 이 졸렬한 전략은 다케다군을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하였다. 하루노부가 사쿠에 머물러있는 틈에, 이나 군의 타카토오 요리쓰구高遠賴繼가 봉기한 것이다.

  요리쓰구는 굴욕적인 패배 이래, 마찬가지로 굴욕적인 복종을 강요당한 후지사와 요리치카藤澤賴親와 은밀히 의논하여, 요리치카의 매형에 해당하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바 있었다. 타카토오 / 후지사와 양 군에 의한 스와 침공은, 시나노 슈고직을 계승한 오가사와라 총령가를 뒷배로 삼아, 초읽기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텐분 13년(1544) 10월 16일, 하루노부는 요리쓰구의 기선을 제압하여 스와로 들어갔다. 친위대旗本만을 이끌고 우에하라 성에 도착한 하루노부는 이타가키 부대 / 스와 부대를 동원하여 군세를 정비한 후, 28일에는 후쿠요 성福與城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이미 장기가 되어 있던 간접 어프로치, 즉 약한 적에 대해 전력을 집중하는 형태가 여기서도 행해졌다.

  그러나 요리치카는, 2년 전의 미야카와 강 다리의 전투 직후 불의에 허를 찔려 다케다의 군문에 항복한 실패를 교훈 삼아, 나가토키가 가세를 위해 파견한 쿠사마 히젠草間備前과 이나 부대伊那衆를 코우진 산 성채荒神山砦에 입성시키는 등, 세심한 전쟁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약한 적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타카토오 성에 맞서 후쿠요 성을 목표로 정한 다케다 군 선봉부대들은, 그 후쿠요 성에 이르는 간접목표인 코우진 산 성채를 29일에 포위하고, 다음 달인 10월 1일에 하루노부의 동생인 다케다 사마노스케 노부시게武田左馬助信繁의 지휘하에 맹공을 개시했다. 오가사와라 군은 그날 내로 성채를 포기했으나, 후쿠요 성에서 온 원군과 마쓰시마하라松嶋原에서 합류하여 다케다 군을 맞아쳐, 그들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케다군은 후쿠요 성을 공격하는 데 애를 먹다가, 6일에 타카토오군의 원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고 스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노부는 8일까지 스와에 머물러 타카토오 / 후지사와 양 군을 견제했으나, 요리쓰구는 다케다군이 가이로 돌아감과 동시에 스와로 출병, 카미샤上社의 칸오사神長 저택 등을 방화했다.

  선제공격이 불발로 끝나고 후쿠요 성의 공략에 실패하면서, 대 타카토오 싸움은 해를 넘기게 되었다. 텐분 14년(1545)의 카미이나 침공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 후쿠요 성에 애를 먹었던 반성에 기반하여, 적의 수괴인 요리쓰구의 타카토오 성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이제는 대 오가사와라 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카미이나 군의 공방을 전체적으로 보면,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본거지인 치쿠마 군에 가까운 후쿠요 성보다는, 타카토오 성 쪽이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4월 11일, 군나이 부대와 일족인 야나야마 이즈노카미 노부토모穴山伊豆守信友가 이끄는 카와치 부대를 가세시켜 고슈(甲州, 가이 지방)의 총력을 결집한 하루노부는 비가 내리는 와중에 출진했다. 타카토오 공격 당시에는 종시 비가 끊이지 않았던 걸로 보이며, 다케다군이 우에하라 성에 입성한 14일에도 부슬비가 내린 모양이나, 이 비는 하루노부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은혜의 비" 였다. 다음 날인 15일, 종일 계속 내리는 비를 맞으며 츠에츠키 고개杖突峠를 넘은 다케다군은 악천후 속에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타카토오군의 불의를 찌르는 형국이 되었다. 요리쓰구는 17일 성을 버리고 도주하여, 텐분 11년(1542) 이래 3년에 걸쳐 저항하던 본거지를 잃었다.

  다음 날인 18일, 하루노부는 점령한 타카토오 성으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카미이나에서의 작전은 이걸로 끝난 건 아니었다. 20일 타카토오를 출발한 다케다군은, 그 날 오시(午刻, 오전 11시 ~ 오후 1시)에 후쿠요 성을 포위했다. 오가사와라 군의 가세로 인해 강화된 후쿠요 성에 대한 공격은 신중히 개시되었으나, 29일의 공격에서는 카마타 나가토노카미鎌田長門守가 전사하는 등, 대실패로 끝났다. 이제는 은혜의 비가 아닌, 마른 장마 속에서 공방이 계속되었다.

  5월 21일, 오가사와라군이 입성해 있던 류가사키 성채龍ケ崎砦에 실시한 공격은, 고슈군 최강으로 알려진 군나이 부대가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이 격퇴당했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이마가와 군今川勢이 원군으로 왔으나, 6월에 들어서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가 류가사키 성채를 함락시키기까지 전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의도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던 하루노부에게 이 류가사키 성채의 함락은, 마지막 기회였다. 하루노부는 아냐야마 이즈노카미 / 오야마다 데와노카미들에게 주선케 하여, 마음을 달리 먹고 화해공작을 개시했다. 류가사키 성채의 함락으로 상당히 나약해져 있던 요리치카는 6월 10일이 되어 드디어 이에 응하여, 요리치카의 동생이 인질로서 아나야마 이즈노카미에게 양도되었고, 후쿠요 성은 파괴되었다. 남쪽에서 스와 군을 위협하는 세력은, 이 날을 끝으로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하루노부와 중신들은, 이번에도 실수를 범했다. 미야카와 강 전투 후에 후쿠요 성을 공격하여, 결과적으로 전국을 확대하게 만들었던 우愚를, 다시 반복한 것이다.

  13일, 치쿠마 군 시오지리鹽尻로 진출한 하루노부는 다음 날 14일, 나가토키의 본거지인 하야시 성林城의 근처까지 병사를 진격시켜 방화하고, 신겐 자신도 시오지리 북방의 키쿄우하라桔梗原로 진채를 옮겨, 쿠마노이 성熊野井城을 자락自落하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시(子刻, 오후 11시 ~ 오전 1시)에는 나가토키의 저택에까지 방화했다. 아무리 불의를 찔렀다고 하지만 이 때의 다케다 군에게는 치쿠마 군 전체를 제압할 여력은 없었기에, 이는 오로지 나가토키를 자극하기만 한 폭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15일에 키쿄우하라에서 승전고를 울린 후, 17일에는 후츄로 돌아가버린 것만 보더라도, 다케다 군은 신속히 병사를 물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이 오가사와라군의 역습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란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나가토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는 커녕, 일부러 역린을 거슬러 도발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렇게, 오가사와라 총령가의 세력권 밖에서 실시되어야 했을 카미이나에서의 작전은, 그대로 오가사와라와의 전면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카미이나 군 평정이 완료되었으니 사쿠 군의 평정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노부는 뻔히 알면서도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하루노부는 이 해의 후반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었다. 하루노부는 스루가駿河에서 매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와 만나, 항복한 후지사와 요리치카들을 대동하고 이마가와군에 가세하여 각지를 전전했기 떄문이다.

  이 원정 중, 하루노부와 중신들은 이마가와 가문과 침공해 온 호죠 가문北条家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여, 대영주 간의 외교를 중개할 정도의 정치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하루노부는 이마가와 가문과 호죠 가문의 실력을 깨닫고, 그 초조함은 그 이후의 전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덧글

  • 함부르거 2014/11/24 10:36 # 답글

    흔히들 다케다 신겐을 군신으로 추앙하면서 그 아버지 노부토라는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략적 안목에서는 노부토라 쪽이 훨씬 올바른 방향이었군요. 후에 오다 노부나가가 호족들을 제압하고 병농분리를 통해서 강군을 만들어 낸 것과 유사한 방향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부친 노부히데 대에서부터 호족들과 숱한 내전을 거치며 독재의 기반을 만들어 온 노부나가와 호족들의 지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던 신겐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시이나 타카시 만화에서였나? 오다 가를 사장 맘대로 할 수 있는 벤처기업, 다케다 가를 숱한 중역들이 있어서 회장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대기업에 비유한 것을 봤는데 진짜 적절한 것 같습니다. ^^
  • 3인칭관찰자 2014/11/24 18:20 #

    노부나가의 경우 아버지인 노부히데가 이미 길을 닦아 놓은데다 거기에다 당주가 되었을 때의 환경차이가 신겐과 노부나가의 차이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겐은 호족들에게 옹립되어 당주가 된 데 비해 노부나가는 아버지가 죽자마자 호족들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들까지 등을 돌린 자가 많았기에 그들과 싸웠으면 싸웠지 배려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전국시대 일본이 집권화된 가문의 독재적 영주인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걸 보면 노부토라의 방식이 결론적으론 옳았다 할 수 있겠지만 노부토라가 추방당했듯 비슷한 일을 하려다가 쫓겨나거나 칼침맞은 영주들도 많았기에 그런 면에선 노부나가가 행운아로 보이기도 합니다. ^^

    그러고 보니 시이나 타카시 씨 만화 중에서 히데요시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오다 가문을 그린 만화가 있었죠. 거기서 나온 대사인지는 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 표현은 말씀대로 정확히 찝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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