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6호(2002년 12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께서 집필하신《쿠로다 죠스이의 세키가하라》를 번역한 것으로,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 죠스이如水)가 큐슈에서 벌인 전투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북 큐슈 평정되다

  죠스이가 드디어 지츠죠지 산實上寺山에 도착했을 무렵, 승기를 완전히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요시무네와 오토모군은 여전히 타테이시 성에 농성해 있었다. 이는 배후에 토미쿠富來 / 아키安岐 등을 적대세력으로 두고 있는 죠스이에 있어서 상당히 성가신 사태였다.

  쿠로다군의 사상자는 수적으론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이는 급히 병사로 동원된 자들이 전장에서 재빨리 도주하였기 때문이지, 전장에 머물러 싸움의 중핵을 이룬 쿠로다 가신단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쉽게 보충할 수 없는 장성將官급의 가신을 잃은 것은 치명적으로, 죠스이는 더욱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14일, 죠스이는 모리 타헤에를 요시무네에게 사자로 보내어 항복권고를 했다. 무리하게 공격하여 손해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했기도 했고, 항복한 성의 병사들을 가담시켜 손실을 메우려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이 책략은 맞아 떨어져, 요시무네는 죠스이의 진에 타와라 죠닌을 파견하여 항복했다. 요시무네와 그 측근 몇 명은 나카즈로 호송되었고, 배하의 장병들은 그대로 쿠로다 군에 편입되었다. 최대의 위협을 제거한 죠스이는 병사를 쿠니사키國東 반도로 돌려 아키 성을 포위했다. 여기에서도 죠스이는 우선 성을 포위하고 위협한 후,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권고하여, 포위한지 3일만에 성문을 열게 했다.

  그러나 토미쿠 성의 경우는 그 수가 통하지 않았다. 성내에서는 일치단결하여 부재중인 당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죠스이는 전원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교섭했으나 성 병사들의 저항은 10일간 계속되었고, 성주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가 전사한 것이 성내에 알려진 이후에야 성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참진을 요구하는 죠스이의 공작은 대단히 호평을 얻었고, 항복한 성의 장병들 대부분은 쿠로다군에 가담했다. 죠스이의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고, 여기에다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이겼다." 는 소식이 전해지자 쿠로다군은 갈수록 그 병력이 증대되어, 서군에 가담한 분고의 제후들은 줄을 이어 죠스이의 군문에 항복했다.

  그러던 중에, 우스키 성에 농성한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의 저항은 예외적으로 격렬했다.
 
  카즈요시는 니와 에치젠노카미 나가히데丹羽越前守長秀 / 니와 카가노카미 나가시게丹羽加賀守長重 부자父子의 가신이었으나, 나가히데가 죽은 후인 텐쇼 13년(1585)에 집안소동이 터진 니와 가문이 감봉당했을 때 히데요시의 직속 신하가 되어, 그 이후로 각지를 전전하며 부교奉行 내지 대관으로 발탁된 유능한 무사로 도요토미 관료 중에서도 군사관료적인 성격이 강했다. 조선 출병에서도 여러 차례 조선으로 건너간 바 있으며, 동서 어느 쪽의 진영에서도 출진을 요청받지 않았던 건 아마도 케이죠 2년(1597)의 울산성 농성전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라 생각된다.

  그러하였기에, 카즈요시의 저항에는 죠스이도 고전하게 되었다. 9월 15일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주력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농성하다가, 10월 4일에 드디어 힘이 다해 항복하기까지 거의 반 달 이상이나 버텨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죠스이는 패배한 서군 제장들이 오사카 농성을 단념하게 영지로 돌아올 가능성에 대비해 분고 앞바다에 수군을 배치하는 한편으로, 큐슈 동해안 각지의 동군 쪽 성들과 복속해 들어온 서군 쪽의 성에 경계할 것을 명령했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킷카와 히로이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건 이미 죠스이도 알고 있었고, 히로이에가 찬성하지 않으면 모리 군이 오사카에 농성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서군에 가담한 큐슈의 제후들은 영지로 돌아오려고 할 것이고, 그들 영지에서의 항전을 저지하기 위해선 그들이 돌아오는 그 자체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죠스이가 동원할 수 있는 수군력은 별 볼일 없는 정도로, 정보의 유입을 차단하는 정도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서군 제후가 제대로 된 병력으로 돌파하려고 한다면, 이를 완전히 저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해상에서의 요격은 약한 적에 대해서만 유효 했고, 강적에 대해서는 일단 상륙시킨 후 육로로 영지에 도망쳐 들어가는 도중에 포착섬멸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죠스이는 거의 무상無傷에 가까운 타치바나군의 통과를 방관해야만 했다. 시마즈군에 대해서는 분고 모리에森江에서 그들을 습격한 군선이 이쥬인 히사토모伊集院久朝 이하 38명의 목을 베었으나, 육상에서도 시마즈군은 봉쇄선을 우회하여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죠스이의 경계망은 가장 경계해야 할 시마즈 가문이나 타치바나 가문에 대해선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큐슈의 전황은 동군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추이가 계속되었다. 분고 평정을 9월 말쯤에 거의 완료한 죠스이는 10월 4일에 부젠으로 돌아가 우선 모리의 영지인 카와라다케 성香春嶽城을 포위하여 항복시키고, 그 병사들을 앞장세워 고쿠라小倉로 밀고 들어가 성문을 열게 했다. 카와라다케 성 포위 ~ 고쿠라 개성開城까지 10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보면, 이에야스의 승리를 알게 된 죠스이가 보다 더 신중해진 것은 틀림없다.

  죠스이는 오토모 요시무네를 붙잡은 시점에서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 그러는 김에 "큐슈는 정복하는 대로 영지로 주겠다" 는 것을 확인받고, 거기에다 자신과 나가마사의 공적을 개별로 평가해 달라고 이에야스에게 요청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리고 죠스이의 활약에 대해서, 이에야스 쪽에서도 온갖 포상을 줄 것을 암시하는 서신이 보내져 왔다.

  그러나 죠스이는, 이것들이 공수표가 될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성주가 서군으로 출정한 성 대부분은 놔 두어도 알아서 항복하리라는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죠스이가 멋대로 큐슈를 평정하는 걸 인정하게 되면, 카미카타에서 서군 영주들을 격파한 제장들에게 줄 영지가 부족해진다. 죠스이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말하자면 접수대행자의 수수료벌이 정도로 생각하였기에 극력 손해를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죠스이는 큐슈 각지에서 싸워나갔다. 치쿠젠 아키즈키秋月를 경유하여 북방에서 치쿠고 지방으로 들어가,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의 쿠루메 성久留米城을 항복시키고, 이어서 오즈大津에서 도망쳐 돌아온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야나가와 성柳川城을 포위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둘 다 피를 흘리지 않고 성문을 열게 한 것이었다. 10월 하순에는 치쿠고 평정이 완료되었고, 휴가日向의 이토 가문은 죠스이의 지도에 따라 아키즈키 가문의 지성支城인 미야자키 성宮崎城을 제압했다.

  큐슈에서 서군에 가담한 제후는 11월이 되면 시마즈 가문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었으나, 그 시마즈 가문도 동군을 맞아 싸울 상태는 되어 있지 않았다. 키리시마霧島를 넘어 영내로 도망쳐 들어온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주종 80여 명은 10월 3일 초라한 몰골로 오오스미大隅 토미쿠마 성富隅城에 도착했으나, 요시히로의 직할 군세가 받은 타격은 단기간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대했다.

  주력결전에 참가하여 세키가하라에서 퇴각하는 도중에 전멸한 시마즈 군은 병력 자체는 1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중에는 요시히로의 중신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ㆍ요시히로의 조카(막내동생 이에히사家久의 아들)로 휴가 사도하라 2만 8천 석을 영유하던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 등, 시마즈 가문의 중핵이 되는 무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태반은 전사하고, 나머지 제장들 다수도 요시히로와 흩어져 도피행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요시히로 직할군은 야전병력으로 기능할 수 없다. 한 쪽 날개를 꺾인 것과 마찬가지인 시마즈 가문으로선, 죠스이들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여력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카미카타에서의 주력결전에 말려든 후쿠하라 / 쿠마가이 / 카키미들은, 서군 주력이 세키가하라로 전진轉進하였다가 패배한 이후에도 오가키 성大垣城에 농성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18일, 동군과 내통한 사가라上良 / 아키즈키 / 타카하시高橋 등의 제장들에게 습격받아 쿠마가이와 카키미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살아남아 항복한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直高도 이세 아사쿠마朝熊에 유폐된 후, 10월 2일에 자살했다. 영주를 잃은 그들의 영지는 깡그리 몰수당했다.

  단고丹後 타나베 성田邊城 공격에 참가했던 하야카와 나가마사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죠스이에게 항복한 오타 카즈요시도 목숨을 건졌다. 우스키의 오타 가문은 종시 큐슈에서 싸웠고, 그리고 처분을 당한 유일한 가문이 되었으나, 죠스이는 이 드센 무사武辺者에 상당히 감복한 듯, 중재를 서서 영지 몰수만으로 끝나게 해 주었다.

  최종적으로, 부젠에서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와 그 자제들 전원이, 분고에서는 오타 / 후쿠하라 / 하야카와 / 쿠마가이 / 카키미 다섯 가문이 카이에키(改易, 영지를 몰수당함) 당했다. 11월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이에야스로부터 정전을 명령받은 큐슈의 동군 제후들 모두가 작전행동을 중지한 시점에선, 이들 여섯 가문의 영지를 포함한 부젠 / 분고 두 지방과 치쿠코 지방 절반이 모두 죠스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죠스이 개인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키가하라 결전 이전, 즉 9월 15일 이전에 죠스이가 함락시킨 성은 분고 타카다 성 뿐이었기 때문이다. 죠스이가 요구하고 요구한 조건들은 결국 완전히 무시당한 것이다.

  한편, (쿠로다) 나가마사의 수수하고 견실한 정략은 세키가하라의 주력결전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 엄청나게 화려한 결과를 낳았기에,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일군의 장으로서, 결전장에서도 바로 정면에 있는 이시다 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술을 고안하는 데 온갖 지혜를 짜내기도 했으나, 나가마사가 치쿠젠 나지마名島 52만 3천 석으로 영전한 건 사실상 이 뒷공작(역주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 킷카와 히로이에를 동군으로 배반시킴)에 의해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가봉 폭은 도쿠가와 일족들을 제외한 동군 제후들 중에서 3등인 34만 석에 달하여, 쿠로다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 후다이 제후들의 최상층부를 점하던 20만 석 전후의 중견영주에서, 도쿠가와 일족들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당당한 대영주로 비약한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 주요 영주들의 석고 증감

영주
세키가하라 이전
세키가하라 이후
가봉량
증감폭
유우키 히데야스
(이에야스의 차남)
10만 1천 석67만 석56만 9천석▲▲▲
가모 히데유키
(이에야스의 사위)
18만 석60만 석42만 석▲▲▲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이에야스의 4남)
10만 석52만 석42만 석▲▲▲
이케다 테루마사
(이에야스의 사위)
15만 2천 석52만 석36만 8천 석▲▲▲
마에다 토시나가
83만 5천 석119만 5천 석36만 석▲▲▲
쿠로다 나가마사18만 석52만 3천 석34만 3천 석▲▲▲
모가미 요시아키24만 석57만 석33만 석▲▲▲
후쿠시마 마사노리20만 석49만 8천 석29만 8천 석▲▲▲
가토 기요마사25만 석51만 5천 석26만 5천 석▲▲▲
다나카 요시마사10만 석32만 5천 석22만 5천 석▲▲▲
호소카와 타다오키18만 석39만 9천 석21만 9천 석▲▲▲
아사노 요시나가16만 석37만 6천 석21만 6천 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35만 7천 석51만 석15만 3천 석▲▲
야마우치 카즈토요6만 9천 석20만 2천 석13만 3천석▲▲
토도 타카토라8만 석20만 석12만 석▲▲
다케다 노부요시
(이에야스의 5남)
4만 석15만 석11만 석▲▲
이코마 카즈마사6만 5천 석17만 1천 석10만 6천 석▲▲
가토 요시아키10만 석20만 석10만 석▲▲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이에야스의 사위)
2만 석10만 석8만 석
호리오 타다우지17만 석24만 석7만 석
테라자와 히로타카8만 석12만 석4만 석
나카무라 타다카즈14만 5천 석17만 5천 석3만 석
사토미 요시야스9만 석12만 석3만 석
쿄고쿠 타카토모10만 석12만 3천 석2만 3천 석
다테 마사무네58만 5천 석60만 5천 석2만 석
하치스카 요시시게17만 7천 석18만 7천 석1만 석
쓰쓰이 사다쓰구20만 석20만 석
호리 히데하루30만 석30만 석
시마즈 요시히로56만 석56만 석
모리 테루모토120만 5천 석36만 9천 석- 83만 6천 석▽▽▽
우에스기 카게카쓰120만 석30만 석- 90만 석▽▽▽


  아마도 이 결과는, 죠스이에게 반드시 불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해 큐슈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도요토미 형 군사관료제도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자 그 선구자이기도 한 죠스이는, 정략에서 전술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솜씨를 짜내어 그가 가진 기술을 집대성해 유감없이 발휘했다. 본인의 연기하에 스스로의 군역軍歷과 도요토미 정권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2165
435
415099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