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6호(2002년 12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께서 집필하신《쿠로다 죠스이의 세키가하라》를 번역한 것으로,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 죠스이如水)가 큐슈에서 벌인 전투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 거병 - 큐슈에 일어난 군사적 진공상태 -


  이시가키바루 전투

  그러나 죠스이의 기대와는 달리, 요시무네는 생각을 바꾸지 않은 채 (9월) 9일 벳푸우라別府浦에 상륙했다.

  죠스이의 예상대로, 나카가와 히데시게의 요리키與力가 되어 있었던 타와라 죠닌田原紹忍이나 무나가타 가몬 시게쓰구宗像掃部鎭續 같이 요시무네의 밑으로 달려온 옛 신하들은 모두 요시무네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카미노세키上關에서 우연히 요시무네 일행과 만난 요시히로 카헤에 무네유키吉弘加兵衛統幸는, 몸을 의탁하고 있던 치쿠고 야나가와柳川의 타치바나立花 영지에서 에도로 향하여, 이에야스의 인질로 잡혀 있던 요시무네의 장남 요시노리義乘를 옹립하여 아이즈 정벌에 참가하려고 했었기에 필사적으로 요시무네의 마음을 바꾸려고 했던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출병 당시 분로쿠 2년(1593)의 (황해도) 봉산鳳山 철퇴사건과 마찬가지로, 요시무네는 요시히로 무네유키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타테이시 성立石城을 수축하여 본진을 그 곳에 두고서, 타와라 죠닌들을 호소카와 령 키즈키 성 공략에 파견했다. 이 때 이미 일족과 부하들을 데리고 온 옛 신하들이 분고 각지에서 속속들이 참진하여, 오토모 군의 병력은 이제 3천 명을 상회했다. 여기에 힘입어 요시무네는, 과거의 봉산 철퇴의 실점을 만회하기 위하여, 얄궃지만 이번에도 무네유키의 의견을 물리친 것이다.

  한편으로, 오토모 군이 상륙한 때와 같은 9일 아침에 죠스이도 행동을 개시했다. 오토모 측에 어떠한 사정이 있든, 이빨을 들이민 이상 철저하게 때려눕혀야 한다. 빈집과 다름없는 큐슈에서, 서군 최대의 야전병력인 오토모 군을 격파하고 그 위협을 조기에 제거할 수 있다면 분고는 물론이고, 큐슈 북부 전역을 죠스이의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카즈中津를 출진한 죠스이는 다음 날인 10일에 분고로 침입, 타카다 성高田城에 다다랐다. 타케나카 (한베에) 시게하루竹中重治의 사촌에 해당하는 성주 타케나카 시게토시竹中重利는, 오다와라小田原의 진(=히데요시의 간토關東 평정전)에서 히데요시의 호위 기마무사 대장을 맡고, 케이죠의 조선출병(=정유재란) 때는 선봉 감찰관으로 출진한 바 있는 전형적인 도요토미 관료였는데, 아이즈 정벌에 참진하기 위해 오사카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서군에 포섭되어 있었다. 성주의 부재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던 타카다 성은, 대군을 앞에 두자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시게토시의 장남 시게쓰구重次가 병사 200명을 이끌고 쿠로다 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어서 토미쿠富來 / 아키安岐 두 성을 공략하기 위해 동진하던 죠스이는, 아카네 고개赤根峠에 도착한 시점에서 오토모 군이 키즈키 성을 포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을 포위한 오토모 군은 2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들의 절반 이상이 되는 병력을 보유하고서도 호소카와 군은 굳이 성내에 농성해 있었다.

  어찌됐든 오토모 군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는 이상, 죠스이에게는 일전을 벌여 요시무네를 굴복시키든가, 오토모 군을 가루가 될 정도로 공격하여 박살내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토모 군이 타테이시 성에 농성해 저항하게 되면, 단기결전을 벌일 가망은 없다. 키즈키 성은 오토모 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서, 가능한 한 계속 저항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계산했으면서도 죠스이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오토모 군의 전의를 오산하고 있었다. 오토모 군은 고작 3일만에 키즈키 성의 니노마루二の丸까지 함락시켜, 호소카와 군의 용장 마쓰이 야스유키를 궁지에 빠뜨렸다.

  의외로 건투健鬪하는 오토모 군에 맞서, 죠스이는 병력을 분산시켰다. 4번 부대인 이노우에 쿠로우에몬井上九郞右衛門에게 5번 부대인 노무라 이치우에몬野村市右衛門 / 고토 사몬後藤左門, 6번 부대의 토키에 헤이다유市枝平大夫 / 모리 요헤에母里與兵衛, 7번 부대의 쿠노 지자에몬久野次左衛門 / 소가베 고우에몬曾我部五右衛門 / 이노우에 쿠로베에井上九郞兵衛 / 쿠로다 야스다유黑田安大夫들을 배속시켜, 3천 명 정도의 별동대를 편셩시켜 키즈키로 향하게 한 다음, 토미쿠에는 선봉부대인 모리 타헤에母里太兵衛를 보내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2번 / 3번 부대와 하타모토 부대를 이끌고 아키로 향한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중앙의 정세 (1) 

9월 1일
이에야스, 에도 출발
9월 3일
이에야스, 오다와라 출발.
도쿠가와 히데타다 코모로 도착
9월 6일
이에야스, 스루가 시마다 도착.
히데타다,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성 공격 개시.
9월 9일
이에야스, 미카와 오카자키 도착
9월 10일
이에야스, 오와리 아츠다 도착
9월 13일
이에야스, 기후 성 도착


  이 대담한 선택은, 병력을 분산하는 게 하책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토모 군의 제장들을 동요시켰다. 쿠로다 군이 전군을 이끌고 밀어닥칠거라 착각한 오토모 군은, 원군에게 포착되는 것을 피해 신속히 키즈키 성의 공략을 단념하고, 12일에 타테이시로 후퇴했다.

  이를 본 쿠로다 군 선봉의 제장들은, 죠스이로부터 자중할 것을 재촉받으며, 섣부른 교전을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추격할 것을 결단했다. 추격을 주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던 데다, 오토모 군을 이대로 돌려보내게 되면 호소카와 군 제장들의 체면이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노우에도 결국 추격을 강행하기로 마음먹고, 호소카와 군 1천 명을 가세시킨 쿠로다 군은, 오토모 군을 쫓아 타테이시로 향했다.

  이 폭주에 대한 보고는, 그 날 일몰 전에 죠스이의 귀에 들어갔던 듯 하다. 이노우에들이 오토모 군을 쫓아 남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죠스이는, 아키 성을 내버려두고 전장으로 급행했다. 13일, 죠스이로부터 후미 부대로 임명된 쿠리야마 시로우에몬이 쿠로다 군을 추격하기 위해 성에서 출격한 쿠마가이 군을 분쇄했다. 그러나 죠스이는 이 때 이미 키즈키를 향해 출발한 후라, 아키 성을 공략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죠스이는 제 때 도착하지 못했다. 13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죠스이와 그 주력군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오토모 군이, 거의 비슷한 숫자인 이노우에 별동대를 격파하기 위해, 타테이시 성에서 치고 나간 것이다.

  조선 출병 이래, 겁 많고 무능하다는 평판이 퍼진 요시무네였지만, 물러날 길이 없는 상황도 한 몫하여 이 날 아침에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총합 4천 명 정도의 병력을 앞뒤 3열로 배치하고, 본진을 타테이시 마을 밖까지 진격시켜 지츠죠지 산實上寺山에 진을 친 쿠로다 / 호소카와 군에 대항하여, 선진과 제 2진을 타테이시 교외에 있는 이시가키바루까지 진격시켰다.

  이시가키바루는 거대한 화산탄이 산재해 있는 황야로, 중앙 부근에는 그 이름대로 동서 6정(대략 650m)에 걸쳐 높이 1장(약 3m) 정도의 화산탄이 마치 이시가키(石垣, 돌담)와 같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정말로 대군의 진퇴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험준한 지형은, "이시가키" 를 선점할 수만 있다면, 병력적으로 불리하고, 유력한 지원부대도 없는 오토모 군에게는 바라 마지않는 견고한 진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승산이, 평소와는 다르게 요시무네를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만들었다.

  이 때 오토모 군의 선봉이 된 요시히로 무네유키와 무나가타 시게쓰구는 "이시가키" 를 확보하지 않으면 아군은 반드시 패배한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하여 필사적으로 전진했다. 쿠로다 군 쪽에서도 선봉인 토키사카 / 모리 / 쿠노 / 소가베 들이 "이시가키" 를 탈취하기 위해 남하했기 때문에,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양군이 어우러진 대난전이 펼쳐졌다.

  노회한 오토모 군의 사무라이 대장들에 비해, 죠스이의 지휘가 닿지 않는 쿠로다 군은, 제장들의 연계가 미흡했다. 선봉만으로 2천 명을 상회하는 병력을 갖고서도, 좌우 양익을 통해 오토모 군을 옥죄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돌출했다가 허점을 찔려, "이시가키" 남쪽에 남겨져 있던 쿠노 지자에몬 / 소가베 고로우에몬이 차례대로 전사했다.

  전투는 용이하게 결착이 나지 않고, 일몰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요시히로 무네유키가 이노우에 쿠로우에몬과의 일기토에서 중상을 입게 되자, 오토모 군의 선봉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패주하는 오토모 군을 추격한 쿠로다 군은, 무나가타 시게쓰구를 포함한 장병 5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추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병력을 모두 사용하고, 전 부대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기에 쿠로다 군은 일몰과 동시에 지츠죠지 산까지 후퇴한 것이었다.

  이 때 요시무네는, 아직 수중에 하타모토(旗本, 친위대) 부대와 후미부대를 남겨놓고 있었다. 요시무네가 이들을 투입했다면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죠스이와 그 주력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예비병력의 투입을 주저하다, 결국 요시무네는 승기를 놓치고 말았다. 말하자면 죠스이의 그림자에 위협받아 패한 것과 같았다.

  죠스이가 이 승전보를 받은 것은, 전장에서 2리 정도 떨어진 히지日出를 통과한 직후의 일이었다. 케이죠 5년(1600)의 동란 중 큐슈에서 벌어진 유일한 야외결전에, 죠스이는 적을 보지도 않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중앙의 정세 (2) 

9월 14일
이에야스, 아카사카 도착.
쿠이세 강 전초전에서 서군 승리.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양군 격돌. 동군 승리.
9월 16일
이에야스, 사와 산성 공략을 개시.
9월 17일
사와 산성 함락되다
9월 19일
이에야스, 쿠사즈 도착.
고니시 유키나가 생포되다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 생포되다
9월 24일
모리 테루모토, 오사카 성 퇴거
9월 27일
이에야스, 오사카 성 입성
10월 1일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들 처형되다
10월 10일
이에야스, 모리 가문과 화해




덧글

  • 無碍子 2014/11/02 19:53 # 답글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93년)의 할배더군요.
  • 3인칭관찰자 2014/11/02 20:01 #

    그렇습니다. 호소카와 가문은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약 2백 수십년간 지금의 쿠마모토 현 대부분을 지배하는 봉건영주가 되었지요. 호소카와 모리히로 수상이 취임할 때 그 조상들(특히 타다오키와 그 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리더쉽' 이 화젯거리가 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 Hyth 2014/11/02 21:31 # 답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곳은 '히데'가 아니라 '히지'일 겁니다.
  • 3인칭관찰자 2014/11/02 21:45 #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056
325
435345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