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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6호(2002년 12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께서 집필하신《쿠로다 죠스이의 세키가하라》를 번역한 것으로,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 죠스이如水)가 큐슈에서 벌인 전투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전 전야의 큐슈 정세

  죠스이가 큐슈를 통괄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텐쇼 15년(1587) 당시, 분고豊後 지방과 부젠豊前 우사 군宇佐郡 남서부는, 분고 오토모 가문大友家의 마지막 당주이자,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羽柴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아 분고 지주豊後侍從로 불리던 사효에노카미 요시무네左兵衛督吉統의 영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분로쿠 원년(1592)에 큐슈의 다른 제후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간 요시무네는 다음 해인 분로쿠 2년(1593)에 명나라의 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평양에 있던 고니시 셋츠노카미 유키나가를 버리고 도주했다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오토모 가문은 카이에키改易당하게 되었다.

  오토모 가문이 영지를 잃으면서 그 땅의 태반이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된 분고는, 미야베 나카츠카사쿄 호우인(宮部中務卿法印, 오미近江 출신의 요리키로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미야베 케이준宮部繼潤) 등의 대관에 의해, 군 단위로 분할지배되었다. 그 후, 그들의 태반이 행정관이나 감찰관으로 조선에 건너가자, 그들에게 은상으로 주어지는 땅이 되어, 행정관 계통의 중소제후가 난립하게 되었다.

  분로쿠 2년(1593) 시점에서의 다섯 대관 중, 쿠니사키國東 / 하야미速見 / 히타日田 / 쿠스玖珠 4군을 지배하고 그 중 2만 석을 임시로 급부받던 미야베 케이준을 제외하면, 나머지 4명은 이 때 영지를 하사받았다. 오노 군大野郡 5만 3천 201석의 대관이 된 오타 히다노카미 카즈요시太田飛騨守一吉는 오노 군 내에 1만 석, 나오이리 군直入郡 3만 2980석의 대관이 된 쿠마가이 쿠라노죠 나오모리는 나오이리 군에 3천 석, 오이타 군 5만 7천 929석의 대관 하야카와 슈메 나가마사早川主馬長政는 오이타 군 내에 1만 석을, 카이부 군海部郡 4만 4천 800석의 대관인 카키미 이즈미노카미 카즈나오垣見和泉守一直는 카이부 군 내에 2천석을 각자의 영지로 삼았다.

  그들은 분로쿠 3년(1594) 이후 점차적으로 영지를 가봉받아, 오타 카즈요시는 우스키臼杵 3만 5천 석 / 카키미 카즈나오는 토미쿠富來 2만 석 / 하야카와 나가마사는 후나이 2만 석 / 쿠마가이 나오모리는 아키安岐 1만 5천 석의 영주가 된 모양이나, 정확한 수치는 확실히 알 순 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들 모두의 영지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다.

  이 외에도,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 / 모리 타카마사毛利高政 / 모리 시게마사(毛利重政, 키즈키杵築 성주가 되었으나, 1597년 사망. 그 후 호소카와 씨가 입성하였다) / 타케나카 이즈노카미 시게토시竹中伊豆守重利들이 분로쿠 2년(1593) ~ 케이죠 3년(1598) 사이에 입봉하게 되었으나, 나카가와의 영지 6만 6천 석(요리키 영지를 포함하여 7만 석 정도)을 제외하면, 그들 모두가 수만 석 이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매부라고도 사위라고도 전해지며, 케이죠 2년(1597) 경에 입봉한 것으로 보이는 후쿠하라 우마노스케 나오타카(福原右馬助直高, 나가타카長堯 / 나가나리長成로도 불림)의 경우에도, 6만 석이라고도 12만 석이라고도 하는 영지의 태반은 지배를 위임받은 도요토미 직할령으로, 거기에다 어중간한 영지 삭감에 의해 영지의 일부가 이동했다고 여겨지기도 하여, 결코 많은 영지를 부여받은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키즈키 6만 석이 호소카와 엣츄노카미 타다오키細川越中守忠興에게 주어져, 타다오키는 본 영지와 떨어진 영토가 된 이 땅의 접수와 처치를 위해 중신 마쓰이 사도노카미 야스유키松井佐渡守康之를, 성주 대리로 아리요시 시로우에몬노쇼 타츠유키有吉四郞右衛門尉立行를 파견했으나, 그 병력은 1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거론된 여러 영지는, 태반이 얼마 안 되는 수비병력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분고 제후들의 영지는, 일체적인 방어체제는 커녕 실제로는 진영구분조차 확실히 되지 않았고, 영지를 지키는 가신들은 카미카타(上方, 일본 중부 교토 / 오사카 지방)에 머물러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는 주군의 지시가 없는 한, 성을 지키면서 그 때마다 적대세력을 격퇴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유일하게 진영구분이 명확한 것은, 당주 이하의 주력부대가 아이즈 정벌에 참가하여 그대로 동군에 눌러앉아버린 호소카와 가문 정도이다.

  큐슈에서의 대박을 노리던 죠스이와 나가마사에 있어서, 군침을 흘릴 만한 땅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이를 위협할 만한 경합세력 역시 적었다. 고쿠라小倉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 요시마사吉政 부자는 모두 카미카타에 있었고, 후시미 성 공략에 참가한 이후도 서군 주력에 속해 있었다. 모리 가문과 코바야카와 가문은 주력군이 카미카타에 있었던 데다 오랫동안 죠스이가 지도를 하고, 나가마사가 전쟁을 같이 치뤘기 때문에 그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쿠로다 영지에 직접 침공한다면 몰라도, 경쟁상대로서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히고肥後는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가 입봉 직후 일어난 잇키一揆로 인해 다음 해인 텐쇼 16년(1588)에 인책을 받고 자살한 후, 히토요시人吉 2만 5천 석의 사가라 가문相良家을 제외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宇土 14만 3천석과 가토 기요마사의 쿠마모토熊本 19만 5천 석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 중 고니시 군은 서군에 가담하여 카미카타에 있었고, 가토 군은 우선 고니시 영지에 대한 대처를 우선해야 했다.


  죠스이의 전략전환

  이와 같이, 당초의 예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쿠로다 가문은 부자가 동서에서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여 은상을 이중으로 받을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그러한 이상, 나가마사에게는 쿠로다 영지 동쪽과 서쪽에 경계를 접하고 있는 강적들을 어떻게 해서든 무력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죠스이도 나가마사가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며, 대치하는 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분고를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즉 나가마사의 공작은 이에야스에 은혜를 팔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쿠로다 가문을 둘러싼 전략정세를 조금이나마 유리하게 가져가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모리 가문의 중신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뒷공작의 상대로 정한 이에야스의 의향은, 그런 나가마사에 있어선 자기 영지를 보전하는 데 있어 바라마지 않던 바였다.

  그러나 서군의 지배영역에 의해 분단됨으로써, 죠스이와 나가마사가 서로 연락하여 서로의 의도를 조율할 수단은 일시적으로 상실되었다. 이 단계에서 부자간의 연락이 충분히 이루어졌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고, 나가마사는 아버지가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이에야스로 하여금 공작 대상들을 쿠로다 가문에 유리하게 유도시키겠다" 고 추측하여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가마사는, 이 도박을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당초에는 형세를 관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지의 죠스이도 독자적으로 모리 가문을 농락하는 데 나서, 나가마사와의 연락회복을 기다려 적극책으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죠스이는 7월 하순 단계에서 병력증강을 개시하여, 이에 따라 긁어모은 야전병력은 거의 9천 명에 달했다. 나가마사를 따라 종군한 병력까지 합치면, 부젠 6군에 지나지 않는 영지에서 1만 4천 400명이라는 대동원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군역 명단에 오른 자들을 한계까지 동원해봐도 이만한 병력은 모이지 않는다. 죠스이는 5천 400명의 정규병에다가, 돈을 마구 뿌려 새로이 등용한 로닌들이나 임시고용한 부정규병사를 3천 600명 정도 긁어모은 것이다. 이 모병비용을 합친 경제적 부담은 보통이 아니었다. 수세 일변도인 상황에서는 본전을 회수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며, 공세로 나선다고 해도 어지간히 큰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죠스이의 전략적 방법론은 나가마사의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뤘고, 기틀을 하나로 모은 것이었다. 모리와 코바야카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자기 영지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에야스의 적대진영을 공작으로 무너뜨린다는 사실로 은혜를 팔고, 그 후에 공세로 전환하여 서군 제후의 영지를 제압한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8월에는 나가마사와의 통신이 회복되었다 보이는데, 모리 / 코바야카와 양 가문에 대한 공작의 창구는 나가마사에게로 일원화된다. 

  모리 / 코바야카와 양 가문의 위협이 제거됨으로서, 문자 그대로 서군 제후들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주게 했던 큐슈 동부에서 고립된 섬과 같았던 쿠로다 영지와 호소카와의 비 본토 영지는, 반대로 동군의 공세거점이 되어 서군세력을 붕괴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영지의 분포도를 분류해보면, 여전히 큐슈의 동군은 고립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젠과 분고, 치쿠젠 뿐만 아니라 치쿠고筑後나 휴가日向 지방의 서군 제후들 대부분도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카미카타에 있었기 때문이다.

  죠스이는 이들 세력들이 카미카타에서 동군주력과 대치하여, 본거지로 돌아올 수 없게 된 순간을 노려서 치고 나가기 위해 자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건 죠스이가 아니었다. 9월에 들어서자마자, 이번에도 죠스이의 예측을 배반하는 형태로, 북 큐슈의 정세에 이변이 생긴 것이다.

  서로 대치하고 있던 상태인 큐슈에서 감연히 일을 일으킨 건, 당시 츄안中庵이라는 호로 불리던 오토모 소겐大友宗嚴. 분로쿠 2년(1593)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처음에는 모리 가문에 / 다음에는 사타케 가문에 맡겨져 있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였다.

  가문 재흥을 조건으로 옛 영지 분고의 제압을 요구받아, 처자를 인질로 잡힌 요시무네는 유유낙낙히 이를 따랐다. 반강제적으로 무기와 전쟁비용을 받고 상당한 수의 로닌을 모집하여, 바닷길로 이동을 개시한 것이다.

  요시무네가 분고 침공을 시도하려 한다는 건, 하야부네의 활약으로 며칠 만에 죠스이의 귀에 들어갔다. 요시무네가 분고에 상륙하면 오토모 가문의 옛 신하들이 달려와, 그 병력은 더욱 더 팽창될 것이다.

  이 요시무네의 잠재적 동원력에 주목한 죠스이는, 단순히 오토모 군의 침공을 저지하는 게 아니라, 아군으로 끌어들여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죠스이는 즉각 설득을 위한 사신을 보냈다. 큐슈의 진(=히데요시 생전의 큐슈 원정)에 선발대로 온 이래, 죠스이는 여러 번 요시무네의 편의를 봐 주었으며, 오토모 가문의 중신들을 지도해 왔다. 분로쿠의 조선출병(임진왜란)에서는 나가마사가 오토모 군까지 아울러 총괄하고 있었고, 쿠로다 가문과 오토모 가문은 오랜 시간에 걸쳐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죠스이가 도리를 이야기하여, 오토모 가문 재건의 최량수를 제시한다면, 겁 많은 멍청이로 알려져 있던 요시무네가 납득할 가능성은 높았다. 그리고 표면적인 서군의 우세에 현혹된 요시무네가 주저한다고 해도, 그 가신들은 죠스이의 의도를 이해해 줄 것이다. 죠스이가 수천의 병력과 함께 과거 시마즈 군을 상대로 완강히 저항한 오토모의 옛 신하들을 노고 없이 손에 넣는다면, 분고 제압은 전격적으로 완료될 것이다. 조선출병 최대의 추문을 불러 일으킨 당사자인 요시무네의 동향이, 얄궂게도 죠스이 전략의 중요한 열쇠를 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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