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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6호(2002년 12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께서 집필하신《쿠로다 죠스이의 세키가하라》를 번역한 것으로,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 죠스이如水)가 큐슈에서 벌인 전투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즈會津 정벌에 모든 것을 건 쿠로다 부자父子

  도요토미 가신단의 분열에 파고들어, 다수파 공작에 성공한 이에야스는, 케이죠 5년(1600) 3월, 작년 겨울에 굴복시킨 마에다 토시나가에 이어, 새로이 다이로大老 하나를 넘어트리려고 했다. 타겟은 케이죠 3년(1598)에 아이즈로 영지를 옮기게 되어, 새 영지에 상주하여 정쟁의 소용돌이로부터 멀어져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였다.

  이에야스는 카게카쓰가 말을 바꿔가며 오사카로 올라오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이유로, 5월에 들어 아이즈 정벌의 호령을 내렸다. 아이즈 정벌의 동원발령에 이에야스와 세 명의 부교는 적지 않은 배려를 했다. 주력군이 될 오우(奧羽, 무츠와 데와. 도호쿠 지방) / 간토關東 / 호쿠리쿠北陸 지방 제후들에게는 100석 당 3~5명을 동원하라는 높은 군역이 부과되었으나, 일본 서부의 영주들 다수에게는 참진을 요구하지 않았고, 참진할 경우에도 지각하는 게 인정되었다.

  큐슈의 제후들에 이르러서는, 참진할 경우도 100석 당 반 명이나 2명 정도로, 이에야스 편으로 간주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같은 경우 영지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단순히 아이즈까지 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가 아니라, 조선출병에 의한 피폐, 특히 케이죠의 진(정유재란)에서의 인적 / 경제적 타격이 컸던 일본 서부 영주들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쿠로다 가문이 동원한 병력은, 통설에 의하면 18만 석의 3인 역에 해당하는 5천 400명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치쿠젠 나지마名島 35만 7천 석을 지배하는 츄나곤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동원병력이 2인 반 역보다도 약간 적은 8천 명(케이죠 5년 8월 5일자로 사나다 부자真田父子 3명에게 보낸 이시다 미쓰나리 편지에 첨부되어 있는 인원기록에 의한다) 이었던 데 비해, 쿠로다 가문의 군역은 이상할 정도로 높다. 통설이 특별히 기록하고 있듯이, 영지에 최저한의 수비병을 남기고, 자군의 장병들을 죄다 카미카타(上方, 교토 / 오사카 지역)로 올려보낸 것치고는 적지만, 그래도 큐슈에서는 비교할 영주가 없을 정도로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지의 수비를 맡은 죠스이는 오사카와 나카즈中津 사이의 중계항인 빈고備後의 토모鞆와 스오 지방의 카미노세키上關에 미리 하야부네早船를 대기시켜 놓았다. 이로써 오사카로부터의 소식은 고작 3일 만에 나카즈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오사카에 머무르고 있던 나가마사도, 아이즈에 내려감에 따라 오사카 저택의 방비를 둘 다 6천 석 녹을 받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 토시야스栗山四郞右衛門利安와 모리 타헤에 토모노부母里太兵衛友信에게 맡겼다. 그 자신이 이끄는 군세는, 4488석의 쿠로다 산자에몬노죠 카즈나리黑田三佐衛門尉一成를 제외하면, 고토 마타베에 모토쓰구後藤又兵衛基次 / 케야 몬도 타케히사毛屋主水武久 / 스가 로쿠노스케 타다토시管六之助忠利 등 1천 석 미만의 중견 가신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영지에는 죠스이의 친동생으로 2천 석을 받는 슈리노스케 토시노리修理助利則와 4천 556석을 받는 즈쇼노스케 나오유키圖書助直之, 6천 석의 이노우에 쿠로우에몬노죠 유키후사井上九郞右衛門尉之房를 남겨놓은 후에 말이다.

  오사카의 방비와 본 영지에 가문에서 가장 많은 녹을 받는 세 노신老臣을 집중시켜 놓고, 오사카 <-> 나카즈 간의 정보전달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인 배경에는, 죠스이와 나가마사의 어떤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다.

  이에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죠스이와 나가마사도 역시, 실각하고 본거지인 사와 산성佐和山城으로 물러나 은둔하고 있던 이시다 지부쇼우 미쓰나리가 아이즈 정벌의 틈을 노려 거병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당히 부자연스런 병력배치의 노림수는, 아이즈 정벌로 인해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는 이에야스를 대신하여, 죠스이가 인솔하는 쿠로다 군의 손으로 "소규모 거병" 을 진압하고 논공행상에서 다른 가문을 크게 제친다는 것이었다.

  아이즈 정벌에 참가한 쿠로다 군의 규모도, 이 계획에 따라 설정된 최대한의 병력이었다. 영지의 상황이나 가문 내 통제 등의 조건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당시 영주들의 영지는 본 영지의 수비병력을 포함하여 100석 당 7인 역 정도까지는 동원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며, 경제적 여력만 있다면, 참진을 명령받은 제후들은 자발적으로 규정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도요토미 정권에 봉공할 수 있었다. 쿠로다 가문의 경우도, 나가마사가 이끄는 주력이 통설로 5천 400명 정도였다고 한다면 영지에는 4인 역 정도의 여력이 남아있게 되고, 죠스이도 마찬가지로 5천 400명 정도의 야전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만한 병력이라면, 미쓰나리와 같은 몇 명의 중소 제후가 거병한다 치더라도, 신속히 오사카로 올라간 죠스이가 오사카에 있는 이에야스 파 영주들을 장악하여 조기에 그들을 진압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죠스이와 나가마사가 각자 활약함으로써 쿠로다 가문은 크게 비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서군 거병 - 쿠로다 부자에게 이용당한 이에야스의 전략


  죠스이 지원을 겸하고 있던 나가마사의 뒷공작

  그러나 카미카타에 일어난 변고는, 이에야스나 죠스이 / 나가마사의 예상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일찍부터 그 거취를 의심받았고, 일부에서는 무장봉기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었으나 실제의 거병은 전략적으로는 지극히 어중간한 시기에,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우에스기 영지 주변에 배치되고 있던 군대가 아직 진격조차 개시하지 않았던 7월 17일, 마에다 / 마시타 / 나츠카 세 부교의 연서장連署狀으로《나이후(內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잘못된 점들》이란 문서가 제후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이로들의 서명은 없었으나, 모리 테루모토는 이렇게 되기 이전에 오사카로 입성해 있었고, 우키타 히데이에도 오사카로 들어와 오랫동안 군세를 머무르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거병인 이상, 세 부교의 이에야스 탄핵이 두 다이로의 가담으로 이어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모리 / 우키타 두 다이로와 부교들 전체가 거병한 이상, 그들은 도요토미 정권의 정당한 군세가 된다. 그 규모는 미쓰나리와 그와 연관된 자들이 단독으로 거병할 경우보다 적어도 10배에 달하였기에,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정권의 정규군인 아이즈 정벌에 참가한 군대에 대해서도, 자웅을 겨루기 힘든 대군이 될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세 노신을 두 명까지 잡아두어 변고가 터졌을 때 대비했다곤 하나, 예상을 아득히 넘은 규모의 서군을 상대론 오사카의 쿠로다 저택에 대기한 병력만으론 저항할 방도가 없다. 쿠리야마 / 모리 두 카로우家老는 그 날 당장 나카즈에 서군 거병을 보고하는 하야부네를 보내고, 동시에 죠스이와 나가마사의 아내를 경호하여 오사카를 탈출했다. 

  이러한 흉보가 죠스이와 나가마사에게 각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0일 전후의 일이었다. 간토에 있는 나가마사는 19일 단계에서 마시타 나가모리가 이에야스에게 보낸 급보문서의 사본과, 24일이 되어 드디어 후시미에 도착한 18일 시점에서의 거병에 대한 정보에 의해, 큐슈에 있던 죠스이는 20일에 도착한 하야부네의 보고에 의해, 차례대로 서군의 거병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에서 서술한 대로, 그들의 예상을 크게 배반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동서에서의 연대로 제후들을 제치고 이에야스에게 공헌하겠다는 죠스이와 나가마사의 계획은 이 단계에서 수포로 돌아가고, 거기에다 전략을 조기에 바꾸어야 할 시기에 그 둘은 일시적으로 연락이 끊겨, 독자적인 판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군 거병의 보고를 알게 된 후의 나가마사의 활약, 특히 정략면에서의 활약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어 준 최대의 요인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담당한 뒷공작의 대상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모리 가문의 중신重臣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 가 전술상의 열쇠를 쥘 중요한 존재가 될 거라고, 공작을 개시한 당초에 예측했을 리는 없다. 최종적으로는 결전의 귀추를 결판낸 뒷공작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에 지나지 않았고, 코뱌야카와 / 킷카와를 내통시키기 위한 나가마사의 심상치 않은 열의는 그러한 결과론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나가마사가 열의를 보인 배경에는, 단순히 이에야스만을 위해서였던 게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극도로 사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나가마사는 아이즈 정벌에 적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으나, 그런 한편으로는 영지에 있는 죠스이도 적지 않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편승하여 큰 공을 세워, 쿠로다 가문의 비약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자기 가문의 존속과 발전을 제 1의 목적으로 삼고 있을 터였고, 만약 그것이 이에야스가 단독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나가마사가 서군의 거병 단계에서 먼저 생각한 것은, 모리 테루모토를 포함한 일본 서부 제후들의 거병이라는 현실, 특히 테루모토가 서군의 총수가 되고 코바야카와 군이 후시미 성 공격 / 포위에 가담해 있는 상황에서 영지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모리의 영지, 육지로 이어진 서쪽으론 코바야카와 영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쿠로다의 영지는,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당할지도 모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양 가문이 서군으로서 큐슈에서 군사행동을 일으킨다면, 죠스이가 총동원한 병력에다 로닌郎人들을 모집한다고는 해도, 영지에 남아 있는 병력만으로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제약된다. 아무리 죠스이의 수완이 두 가문의 제장들보다 뛰어나다고는 해도, 히데요시의 선전으로 그 수완이 전설처럼 여겨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해도, 방어전에 나서는 것이 고작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다.

  죠스이가 방어전에만 치중하게 되면, 서군의 거병으로 새로이 드러난 기회는 뻔히 보면서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야스를 따르고 있는 나가마사로서는 자기 의사대로 병력을 움직일 기회가 없었으나, 이 때 큐슈는 미쓰나리와 연줄이 있는 제후들이 대규모로 오사카로 올라갔기에, 중소 제후들의 영지가 다닥다닥 모여있는 부젠과 분고豊後 지방이 빈 집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덧글

  • healpos 2014/11/01 19:13 # 삭제 답글

    센고쿠 중에서도 이 부분은 잘 모르는 부분이다 보니까, 솔직히 조금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네요.
  • 3인칭관찰자 2014/11/01 20:21 #

    세키가하라 전투 그 자체가 아니라 "세키가하라 당시 칸베에가 벌인 큐슈 지방 내 싸움" 이 주제이니.. 좀 생소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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