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6호(2002년 12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께서 집필하신《쿠로다 죠스이의 세키가하라》를 번역한 것으로,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 죠스이如水)가 큐슈에서 벌인 전투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NHK 2014년 대하드라마인《군사 칸베에》가 슬슬 마무리를 지어가고 있는 지금, 곧 TV에서 방영될 세키가하라 전투 파트에 앞서서(or 함께) 이 글을 읽어주시면 더욱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내전의 불씨 - 도요토미 관료제의 함정과 파벌항쟁

  십인중十人衆 체제의 붕괴

  케이죠 3년(1598) 8월 18일, 극동을 피로 물들인 짧은 여름이 끝났다. 그 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 좌절하여, 국내외의 인명人命을 자기 허영의 제물로 삼은 타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너무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秀賴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며, 도요토미 가문 멸망의 공포에 짓눌리면서 세상을 떴다.

  상궤를 벗어난 시의심으로 히데요리의 잠재적 적대자를 매장시켜 온 히데요시는, 건강을 해친 이후로는 정신적 활력을 잃고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판 짜기에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도자마外樣 제후들을 대표하는 나이다이진內大臣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츄나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 츄나곤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 / 츄나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이상 5명의 다이로大老와, 후다이譜代 제후들을 대표하는 아사노 탄죠쇼히쓰 나가마사淺野彈正小弼長政 / (마에다前田) 토쿠젠인 겐이德善院玄以 / 이시다 지부쇼유 미쓰나리石田治部小輔三成 / 마시타 우에몬노죠 나가모리增田右衛門尉長盛 / 나츠카 오쿠라쇼유 마사이에長束大藏小輔正家 이상 5명의 부교奉行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였다. 중앙집권적 독재로 제후들 위에 군림해 온 히데요시는, 그들 십인중으로 대표되는 제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충성과 온정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십인중에 의해 주도되게 된 도요토미 정권은 타이코가 유산으로 남긴 지나치게 거대한 부채에 의해, 히데요시의 죽음과 동시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이로 필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훈육자인 마에다 토시이에를 두 개의 정점으로 삼은 집단지도체제는, 결과적으로 5다이로들의 세력균형과, 이를 감시하는 5부교의 조정능력에 모든 것이 걸려있었다.

  히데요시가 장기적인 안정적 현상유지를 기대한 집단지도체제는, 복잡하게 얽힌 도요토미 정권의 정치적 대립관계를 2대 파벌로 집약시키고, 그들의 세력균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톱니바퀴가 잘 굴러갈 때에는 괜찮으나, 한 번 역학관계에 어긋남이 생기고 균열이 일어나면, 복구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다.

  그리고 히데요리가 오사카로 자리를 옮긴 직후인 케이죠 4년(1599) 1월, 그 톱니바퀴는 어긋났다. 정권 중핵에서 커다란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건의 중심인물은 다름아닌, 정권의 수반이어야 할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라는 유일절대의 구심력을 잃은 제후들이, 이중삼중으로 복잡하게 뒤섞인 치열한 파벌항쟁을 격화시키고, 최종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며 폭주하기 시작한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이 격화해 갈 정쟁에 대비해 자기 파벌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여, 타이코의 유명遺命을 거역하고 비밀리에 후다이 제후들의 유력자들과 혼약을 맺은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연립 정권의 상대자인 마에다 토시이에와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유야무야되었고, 애매한 정치적 결착이 나는 과정 속에서, 정권을 담당한 십인중의 기량과 정치수단에 격차가 있음을 드러냈다. 거기에다 그 직후인 윤 3월에는 토시이에가 죽었기에, 복잡하게 뒤엉킨 정쟁의 최종적 승리자를 가리고 싶어하던 중소 제후들을 이에야스 밑으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났다.

  이후, 십인중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정권 중핵에서의 항쟁은 급속히 격화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에야스는 모리 테루모토와 연대하여 마에다 히젠노카미 토시나가(前田肥前守利長, 역주 : 토시이에의 장남)를 굴복시켜, 태반의 후다이 제후에게 지지받는 사실상의 단독정권을 성립시켰다. 이로서 도요토미 정권의 집단 지도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이에야스 지지파 제후들 중에서, 가장 일찍 이 대립의 정치적 결착에 넌더리를 느끼고, 최종적 해결수단으로서의 군사력 행사를 각오한 부자父子가 있었다. 과거 코데라(小寺, 쿠로다黑田) 칸베에노죠 요시타카官兵衛尉孝高란 이름으로 알려지고,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카게유노스케勘解由次官라는 관직명으로 불리던 죠스이켄 엔세이如水軒円淸와, 그 아들로 부젠 나카즈豊前中津 12만 석을 영유하는 영주, 쿠로다 가이노카미 나가마사黑田甲斐守長政였다.


  중요시된 죠스이의 존재

  애초부터 도요토미 가문의 후다이 가신단에는, 히데요시가 단기간에 급속히 세력을 불렸기 때문에 충분한 관료집단을 조직할 만한 인적 여력이 없었다. 기껏해야 최하층 호족, 어쩌면 토민土民의 신분에서 기어 올라왔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수족이 되어 가신단을 통괄할 만한 누대의 노신老臣들을 갖지 못했고, 친동생인 다이나곤 히데나가大納言秀長를 제외하면 혼인관계만으로 구성된 일족들一門衆과,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단계적으로 배속된 요리키들與力衆, 두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역시 단계적으로 조직한 근신단近臣團이라는, 그야말로 긁어 모은듯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이들 각각의 구성인원은, 인정사정없는 도태의 파도에 휩쓸려 늘었다 줄었다 하기를 반복했다.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郞 시대는 물론,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筑前守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때에도 히데요시는 만성적인 인재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만성적인 충만감 결여는, 인재수집에 대한 히데요시의 병적인 탐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최초의 표적이 된 자들이, 오다 가문으로부터 맡겨진 요리키들이었다. 키노시타 ~ 하시바 시대에 긁어모은 자들로 이루어져 불안정했던 도요토미 가신단은, 오와리尾張 출신의 아사노 나가마사 / 하치스카 히코우에몬 마사카쓰蜂須賀彦右衛門正勝 / 마에노 쇼우에몬 나가야스前野勝右衛門長康, 미노美濃 출신의 타케나카 한베에 시게하루竹中半兵衛重治, 오미近江 출신의 미코다 한우에몬노쇼 마사하루神子田半右衛門尉正治, 그리고 하리마播磨 출신의 쿠로다 죠스이들, 이런 요리키 무장들에 의해 지탱되어 어쨌든 기능부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사노 나가마사 / 하치스카 마사카쓰 / 타케나카 시게하루 세 사람은, 당시 아직 코이치로 나가히데小一郞長秀라는 이름을 쓰던 친동생 히데나가와 함께, 사실상의 효죠슈(評定衆, 역주 : 합의에 의해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조직)를 형성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아직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던 당시 이미 그 가문에는, 도자마 세력에 의존하는 체질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요리키들이 도자마 취급을 받고 있던 시기는, 텐쇼 10년(1582) 6월에 끝이 난다. 혼노사 정변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횡사하고, 히데요시의 세력권 확대로 인해 가신단이 비대해지면서, 요리키들은 얼마 안가 후다이譜代가 되었다. 죠스이도 히데요시의 재통일 사업을 도와 군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에 등장하게 되어, 텐쇼 13년(1585)의 시코쿠四國의 진이나 텐쇼 14년(1586) ~ 텐쇼 15년(1587)에 걸친 큐슈九州의 진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의 군 감찰관軍目付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후에는 행정에서도 부교로서도 활약했다.

  이러한 죠스이의 공적에 대해서, 히데요시는 그 해 7월 3일, 부젠豊前의 미야코京都 / 츠이키筑城 / 코게上毛 / 시타게下毛 / 나카츠仲津 / 우사(宇佐, 남서부 제외) 6군을 하사했다. 쿠로다 가문은 12만 석의 후다이 제후로서, 키쿠企救 / 타가와田川 2군 6만 석을 영유한 모리 이키노카미 요시나리毛利壹岐守吉成와 함께 큐슈 북쪽 끝이란 전략적 요충지를 위임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쿠로다 가문의 12만 석은, 보통의 12만 석이 아니었다. 쿠로다 / 모리 양 가문의 석고에 우사 군 남서부를 합치면, 부젠 1개 지방 8개 군의 표고 14만 석을 5만 석 가량 초과하게 되는데, 이것은 아마 쿠로다 영지 12만 석이, 옛 영지 4만여 석과의 합계였기 때문으로, 새로이 받은 영지는 7만 석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젠에서의 켄지檢地는 장대를 도입한 실제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주신고를 차출하는 것으로 석고가 정해졌다. 모리 영지의 2군이 평균 3만 석이었다고 하기에, 쿠로다 영지의 실제 석고는 거의 18만 석에 달한다는 설도 있는데, 만약 1군 평균 2만 5천 석, 우사 군의 남서부를 1만 석으로 추정해도, 적어도 14만 석 이상이 된다. 에도江戶 초기의 켄지로 인해 부젠의 석고는 23만 1680석으로 늘어났기에, 쿠로다 영지의 추정 실제 석고는 새로운 영지만으로 14~17만 석. 옛 영지와 합치면 18만~20만 석. 죠스이는 표준 석고에서는 산입되지 않은 6만 ~ 9만 석 정도의 역을 지지 않는 영지를 히데요시로부터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석고로는 대영지라고 할 수 없으나, 은전恩典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표준 석고에 의한 서열도, 하치스카 가문의 17만 7600석에 이어, 이요 5군에 11만 3200석을 받은 후쿠시마 사에몬다유 마사노리福島佐衛門大夫正則 / 와카사 1개 지방과 오미의 옛 영지를 합쳐 11만 2500석이 된 아사노 나가마사를 상회하였다. 제 2세대의 마사노리 / 이시다 미쓰나리 / 가토 카즈에노카미 기요마사加藤主計頭淸正 / 고니시 셋츠노카미 유키나가小西攝津守行長들에 대한 영지 가봉도 20만 석 전후에서 끝난 걸 생각하면, 죠스이는 도요토미 가신단 중에서도 최상위 계층을 형성한 중심의 1인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통일정권의 완성은, 도요토미 가신단의 인재들을 결핍시키고 고갈시켰다. 특히 지방관료로서 요지에 배치해야 할 10만 석 이상의 가신이 결정적으로 부족하여,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일본 각지에 봉하고, 그래도 부족했던지 도자마 제후들에게까지 손을 뻗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수 만석 급의 중앙관료가 십 수 만석 급의 지방관료를 지도하고, 십 수만석 급의 지방관료가 수십 만석 급의 도자마 제후를 통제하게 되는 이상한 구조가 완성되었다.

  거기에다 관료의 대다수를 구성한 도요토미 가신단은, 중신들의 단결에 의한 하극상을 경계하는 히데요시 자신이 그렇게 조장한 바도 있어서, 횡적인 결속이 정말로 취약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관료와, 지방의 전략적 긴요지에 배치된 죠스이와 같은 지방관료와의 사이에서는, 히데요시의 신임을 둘러싸고 다투는 형태의 주도권 싸움이 펼쳐졌고, 군사면에서는 현지 지휘관과 그들을 감찰하는 감찰관들 사이에서의 대립이 현재화되었다.

  의사적擬似的으로 단결하고 있던 도요토미 가신단이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구심점을 잃고, 어이없이 분열한 것은, 그 본질적인 취약성에 의한 결과로, 당연한 결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덧글

  • 태봉이 2014/10/31 12:36 # 삭제 답글

    흥미진진합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취약한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4/10/31 16:41 #

    밑바닥에서 출세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하네요.. 흥미롭게 읽어 주셔서 저도 기쁩니다. ^^
  • 애독자 2014/10/31 13:50 # 삭제 답글

    전국물에 대한 컨텐츠가 참 귀한 나라에서 항상 좋은글 많이 보고 갑니다 아무쪼록 절필치 마시길 기원합니다 ^^
  • 3인칭관찰자 2014/10/31 16:42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중간에 블폭이나 장기잠수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1965
435
415097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