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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줄루 전쟁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168~175쪽의 기사인 (이 잡지의 고정 필진분 중 하나인) 야마자키 마사히로山崎雅弘 씨께서 집필하신《줄루 전쟁》를 번역한 것으로, 19세기 아프리카 대륙에서 위명을 떨친 줄루 왕국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존망을 걸고 대영제국과 사투를 벌인 줄루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와 제 2차 공세

  이산들와나의 패배로 인해 영국군은 장교 52명 / 백인 하사관병 806명 / 흑인 병사 471명 도합 1329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줄루의 맹렬한 위세는 더욱 거칠어져 대영제국의 장병들을 고전시켰다. 이산들와나에서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줄루군은, 패주하는 나탈 징모병들의 뒤를 쫓아 버팔로 강을 건너, 나탈 영내의 주둔지인【 로크스 드리프트 】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크스 드리프트 성채는 스웨덴 인들이 만든 오래된 전도소 건물을 이용하여 증축한 것으로, 지휘관【 차드 중위 】아래 장교 8명 / 하사관 131명이 주둔해 있었으나, 그 중 35명은 병에 걸려 누워 있었기에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후 03:15경, 이산들와나의 패배를 주둔지에서 전해들은 차드는 적의 습격에 대비해 성채의 방비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그로부터 1시간 뒤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산들와나에선 예비대로 대기하였던【 우투르와나 】【 인드루엥그웨 】【 인드론드 】【 우드로코 】가 이끄는 4개 연대 4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병력비율 40대 1이라는 치명적인 열세에 놓인, 로크스 드리프트에 주둔하는 영국군 장병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것 같았다.

  그러나 차드 중위가 이끄는 수비대는 세 방향에서의 포위공격에 노출되면서도, 초인적인 분전 끝에 성채를 이틀간 지켜냈다. 그리고 이산들와나를 거쳐 퇴각해 온 첼름스퍼드의 부대가 성채로 접근 중이라는 것을 감지한 줄루군은, 성채공격을 포기하고 버팔로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해갔다.

  로크스 드리프트의 성채를 문자 그대로【 사수 】해낸 수비대 장병들에게는, 영국 최고의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 】이 수여되었으나, 첼름스퍼드는 그들의 용전을 칭찬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가 입안한【 줄루 침공작전 】은, 근저에서부터 재검토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남부에서 공세로 나선 제 1종대도 1월 22~23일【 냐잔 】과【 에쇼베 】에서 적의 강력한 반격을 받어, 그 진격이 봉쇄되고 있었다. 북방의 제 4종대는 상황이 다른 방면보단 양호했으나, 3월 28일【 프로벤 산】에서 2천 명 규모의 줄루군의 반격을 받아 100명에 가까운 장병들을 잃었다.

  첼름스퍼드는 1만 명 규모의 증원부대 파견을 본국에 요청함과 동시에 새로운 침공작전을 준비했다. 영국 본국정부는 기병 2개 연대와 포병 2개 중대 반, 보병 6개 대대를 4명 이상의 장군과 함께 현지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본국에서의 대답은 그에게 기뻐하고만 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의 실패에 초조해하던 본국 정부가 새로운 사령관으로【 월즈레이 중장 】을 현지에 파견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월즈레이는 5월 26일, 참모장교들을 거느리고 영국 본토를 출항해, 현지 도착과 동시에 첼름스퍼드의 지휘권을 인수할 예정이었다. 체츠와요가 군림한 울룬디를 겨냥한 제 2차 공세는 이제, 첼름스퍼드에게 있어서 자기의 명예를 건 "시간과의 싸움" 이 되었다.


  전사왕국의 종언

  1879년 4월 2일, 새로이 편성된 제 1사단(【 클리록 소장 】지휘)과 제 2사단(【 뉴디게이트 소장 】지휘)은【 마셜 준장 】이 이끄는 기병여단과 함께 트란스발 지역에서 줄루 영내로 침공하여, 북서방면에서 울룬디를 향해 전진을 개시했다.

  대영제국 본국의 부대가, 그 최신장비로 무장하고 개시한 본격적인 공세는 가는 곳마다 줄루 군의 저항을 분쇄했다. 영국군 장병 사이에서는 이제 개전 당초에 보이던 줄루 전사들을 깔보는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고, 소총의 일체사격과 대포, 그리고 당시의 최신형 병기였던 기관총이 낳은 파멸적인 화력 앞에, 창과 방패 그리고 소수의 구식 총으로 무장한 줄루 전사들은 속절없이 탄환에 쓰러져 갔다.

  줄을 이어 날아드는 전멸 소식 앞에, 이젠 싸워서 이길 희망을 상실한 체츠와요는 6월 28일 증정품을 가지고 간 사신을 통해 화평을 요청했으나, 승리를 눈 앞에 둔 첼름스퍼드는 그런 교섭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월즈레이가 5일 전에 케이프에 도착했다는 보고도 이미 첼름스퍼드에게 들어와 있었다. 7월 초에는 그의 선견부대가 왕국의 수도 울룬디 근교에 도착함으로써, 대영제국이 예상 외로 고전한 줄루 전쟁도 이제 최종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7월 4일 오전 6시, 첼름스퍼드는 배하의【 왕실 근위 용기병대 】에 백 움폴로지 강변에 있던 야영지에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용기병대와 그 후속부대는 06:45 경 강을 건너, 줄루군 최후의 거점인 울룬디를 향해 전진하였다. 첼름스퍼드는 이들 부대를 평원에 배치하여 적군을 끌어들인 후, 일제사격을 가하여 섬멸할 생각이었다.

  오전 07:30, 영국군은 울룬디 북방 2km 위치에 펼쳐진【 마라바티니 평원 】중심에 7파운드 / 9파운드 대포, 그리고 기관포 도합 14문을 방사상으로 배치한 방진 구축을 완료했다. 남은 건 줄루 군의 습격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오전 9시를 약간 앞둔 시각, 대지를 뒤덮은 2만 명의 줄루 전사들이 방진의 전방향에서 습격을 시작했다. 호령과 함께 영국 병사들의 총화기가 불을 뿜고, 전사들은 줄지어 쓰러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겁먹지 않고 돌격을 개시해 일부 전사들은 영국 병사들의 대열 앞 30m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에 의한 인정사정없는 사격에 의해 대열이 붕괴된 줄루군은 09:35 경 돌격 중지를 결정, 상처입은 전사들은 북동쪽으로 북서쪽으로 패주를 시작했다.

  이 패배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8월 28일, 국왕 체츠와요는 영국군에게 붙들렸고, 영국군의 새 사령관 월스레이는 줄루 왕국의 영토를 13개 지역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체츠와요는 1882년 8월 런던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 왕국의 존속을 호소했으나 차갑게 거절당했다.

  체츠와요는 1884년 2월 8일, 실의 속에 세상을 떴고 줄루랜드는 1897년, 영국 식민지 나탈에 합병되었다.


  줄루 전사들이 남긴 것     
 
  샤카가 세운 긍지 높은 전사들의 왕국은, 이렇게 60년에 걸친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남겨진 전사들은 대영제국 식민지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로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줄루 왕국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은 줄루 전쟁의 종결로부터 20년 후인 1899년【 보어 전쟁 】을 개시하여, 보어인 국가【 트란스발 공화국 】과【 오렌지 자유주 】에서 발견된 광물자원(금과 다이아몬드)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병력을 전진시켰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기에서도 적의 군사력을 우습게 보는, 줄루 전쟁과 같은 과오를 범하고 만다. 침공한 영국군 장병들은 전장 이곳저곳에서 대패를 당하고 케이프로 철퇴하였으며, 붉은 제복 군대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 있던 보어군 수비대 중에는 용병이 되어 이 전쟁에 참가한 줄루 전사들의 모습도 있었다.

  대영제국에 있어서 줄루 전쟁이란, 본래 케이프 식민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예방전쟁적 성격이 강했으며 줄루를 정복함으로서 영국이 얻은 경제적 이익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줄루 전사들의 저항이 너무나도 심했기에 전쟁에 이긴 영국 수뇌부는 무서운 전사왕국이 재건되는 걸 두려워하여, 원주민들의 의식에서 민족자결의 싹을 뽑기 위한 식민지 정책을 철저히 시행했다.

  1906년에 나탈에서【 반바타 】라는 남자가 반란을 일으켜, 영국 식민지에 인두세를 도입하는 데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주도하였는데, 영국군은 그를 붙잡아서는 목을 베어 가두에 효수하였다. "불사신 남자" 라고 숭배되던 반바타의 잘린 목을 보여준 건, 원주민 사이에서 뿌리깊게 남아있던 민간전승을 부정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들의 독자적인 토착문화를 영국이 가지고 들어온 양복 / 철도 / 자동차 등의 서양문화로 대체시킨다면, 전설이나 예언에서 전해지는 "민족을 구할 영웅" 의 재림을 기다리는 분위기가 구름 걷히듯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 그렇게 재건을 두려워하던 줄루족의 긍지는, 굳은 껍질 속에 든 나무열매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아프리카의 대지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강의 세력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남아프리카 동부에서는 1920년대 이후로【 줄루 】를 자칭한 민족주의적 활동가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13년 이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과 격리정책) 】을 단행한 남아프리카 정부는, 줄루족을 위시한 반투계 아프리카인들을 박해해 나갔으나, 그들도 역시 줄루의 긍지를 멸절시키진 못했다.

  그리고 샤카의 죽음으로부터 147년이 지난 197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드디어 줄루족의 민족자결을 지향하는 정치결사【 잉카타(훗날의 잉카타 자유당) 】가 결성되었다. 줄루 왕국을 재건하겠다는 그들의 비원은 아직 앞날이 다난하지만, 이들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 공공장소에서 제창되는 단계까지는 전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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