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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줄루 전쟁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168~175쪽의 기사인 (이 잡지의 고정 필진분 중 하나인) 야마자키 마사히로山崎雅弘 씨께서 집필하신《줄루 전쟁》를 번역한 것으로, 19세기 아프리카 대륙에서 위명을 떨친 줄루 왕국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존망을 걸고 대영제국과 사투를 벌인 줄루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군의 줄루 침공 개시

  1879년 1월 11일, 붉은 제복을 몸에 두른 대영제국의 장병들은 국경을 넘어 줄루 왕국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영국군의 침공은 첼름스퍼드 경이 당초에 예정하였던 5개 종대가 아니라, 제 1 / 제 3 / 제 4의 3개 종대에 의해 행해졌다.

  공격의 핵심이 될 중앙의 제 3 종대(병력 4천 700명)는【 그린 대령 】의 인솔하에 총사령관 첼름스퍼드 경과 함께【 로크스 드리프트 】의 얕은 여울을 통해 국경에 위치한【 버팔로 강 】을 건넌 후, 동쪽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들의 북쪽에 위치한,【 우드 대령 】이 이끄는 제 4 종대는 2천 250명의 병력으로 버팔로 강을 건넌 후, 지류인【 블러드 강 】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북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그리고 제 3 종대에서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인도양 연안지역에서 진격을 개시한 제 1 종대(병력 4천 750명)는 1월 12일【 피어슨 대령 】의 지휘하에【 투게라 강(버팔로 강의 하류) 】을 도하하여, 줄루 남부의 요충인【 에쇼베 】를 목표로 전진하였다.

  그리고 제 2 / 제 5의 2개 종대는, 식민지를 방위할 예비부대로 나탈의 투게라 강 유역과 트란스발의 륜즈부르크에 배치되었다.

  첼름스퍼드 경은 당초에 "이 전쟁은 7주만에 끝날 것이다" 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원주민 간의 싸움에서는 최강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의 전라에 가까운 복장에다 창과 방패를 손에 쥐고 도보로 뛰어다니는 줄루 전사들은, 최신식 후장총과 대포 / 로켓포까지 장착한 정예 영국군 앞에서는 손쓸 수 없이 패주하는 게 고작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국경 부근을 지키던 줄루 병사들은 득의로 삼는 백병전으로 이행하기도 전에, 영국군이 장비한 총에 의해 원거리 사격을 받아 픽픽 쓰러져갔다. 제대로 된 저항도 받지 않고 로크스 드리프트에서부터 진격을 계속한 영국군 장병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턴가 줄루 전사들을 멸시하는 감정이 퍼져가고 있었다.

  한편, 영국군이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체츠와요는 왕국의 총 병력 5만 명(모두 33개 연대. 그 중 60세 이상의 전사로 구성된 연대는 7개) 중에서, 이미【 울룬디(줄루 왕국의 수도) 】주변에 편성이 완료된 2만 명(12개 연대)에겐 즉각 중앙에서 진격해 오는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고, 동시에 4천 명 정도의 군대(5개 연대)를 에쇼베 방면으로, 그보다 적은 병력(1개 연대)을 블러드 강 방면으로 보내라고 명령햇다.

  그러나 국왕 체츠와요는, 근대적인 영국군의 작전능력이 얕보기 힘든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적의 작전계획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군대의 주력을 움직이는 것을 삼가고, 영국군 기병의 돌입이나 해상으로부터의 측면 상륙작전에 대비해 그 병력의 태반을 왕국의 수도 울룬디에 대기하게 했다.

  제 24 보병연대의 제 1 / 제 2 대대를 중핵으로 한 제 3종대의 전진은, 도하 직후에 쏟아진 장대비로 인해 당초의 예정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었다. 정비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도로는 빗물에 의해 진창이 되었고, 강물이 불어나면서 보급물자의 도하작업은 계속 지연되어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며칠이 지나자 상황이 호전되어, 영국군의 선두부대는 야영에 적합한 바위산 골짜기에 도착했다. 주위 지면에서 110m 정도 융기한, 기묘하게 생긴 바위산【 이산들와나 】의 산기슭에서 영국군은 후속 부대를 기다리며 태세를 가다듬기로 하여, 보급물자를 실은 짐마차가 속속 도착했다.

  영국은 장병들은 침공개시 이래 맞은 첫 휴지기에 몸과 마음을 달래면서, 이산들와나 바위산에【 리틀 스핑크스 】란 별명을 붙이고 등산 나온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2명의 사령관【 은토싱그와요 】와【 마브멘그와나 】가 지휘하는 2만 명의 줄루 전사들이 이산들와나에서 멀지 않은 구릉 속에 집결하여, 붉은 옷의 침략자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대영제국의 악몽 - 이산들와나

  아군 병력의 화력을 과신하고 있던 첼름스퍼드는, 이산들와나에서 야영중이던 그린 대령에게 "적의 습격에 대비해 방어시설을 구축할 필요는 없다." 고 명령했다. 지면이 지나치게 딱딱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이 경솔한 명령은 얼마 안 가 영국군 장병들이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받는 데 일조하였다.

  1월 21일, 척후로부터 받은 보고로 이산들와나 남동쪽에 1천 500명 정도의 줄루 병사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첼름스퍼드는 다음 날인 22일 오전 4:30에 제 2 대대와 기마의용병 대부분에다 대포 4문을 보강한 별동대를 편성하여, 스스로 진두에 서서 줄루 병사들을 "정벌" 하러 나섰다.

  이산들와나의 주둔지에 남겨진 건,【 플레인 중령 】이 이끄는 보병 총합 6개 중대와 소수의 기마의용병 / 대포 2문, 거기에다 나탈인들에게서 징모한 4개 중대 뿐이었다. 1월 22일 오전 08:00, 플레인은 이산들와나 북서족에서 줄루의 대군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보병 6개 중대로는 이산들와나 바위산 동쪽에 얄팍한 경계선을 형성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전 10:30분 경, 첼름스퍼드의 명령을 받고 버팔로 강을 도하한【 댄포드 중령 】의 부대(제 2 종대의 일부, 약 500명)가 도착하여 이산들와나의 영국군 병력은 장교 67명 / 하사관병 1707명으로 강화되었으나, 하사관병들 중 백인은 800명에 지나지 않았고, 남은 900명은 나탈에서 징모한 병사들이었다. 댄포드는 배하의 부대를 플레인 본대의 남동쪽에 배치하여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으나, 바위산 서쪽은 방어선이 텅 빈 상황이었다.

  오전 11:30, 이산들와나에 대한 줄루군의 최초 공격이 시작되었다. 댄포드의 부대가 배치되어 있던【 대 동가 강 】강가의 촌락들을【 우부에 】와【 잉고바마코시 】가 이끄는 2개 연대가 습격한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은 체츠와요가 직접 발탁한 젊은 연대장들로 우부에는 당시 23세, 잉고바마코시는 24세였다.

  협곡을 가득 메워버릴 정도의 대군으로 공격해 오는 줄루군에 맞서 영국군은 2열 횡대로 일제사격을 개시했으나 금방 탄약이 소진되어, 댄포드의 부대는 이산들와나 야영지가 있는 방향을 향해 후퇴하면서 싸움을 계속했다.

  12:15분 경, 줄루군 내습의 보고를 받은 플레인은【 시카리 】의 기마대와, 나탈에서 징모한 병사들인 E중대를 원군으로 보냈으나, 이미 이 때에는 야영지 전체가 줄루군의 거대한【 거친 쇠뿔 】안에 삼켜지려 하고 있었다.

  오후 1시,【 거친 쇠뿔 】의 머리 부분을 구성한【 움치죠 】의 연대와,【 움가포 】【 우노켄비 】연대의 일부가 플레인 본대가 지키는 전선으로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플레인은 아직 수중에 남아 있던 7폰드 대포 2문과 소총, 그리고 약간의 로켓포를 구사하며 필사적으로 응전했으나, 지급받은 탄약을 상회하는 숫자의 줄루 전사들이 줄을 이어 능선에서 모습을 드러내, 전선은 차츰차츰 짐마차가 놓인 바위산 남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01:30분 경, 바위산에 의해 영국군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던【 오른쪽 뿔 】을 맡은 3개 반의 연대(우투투투 / 이산쿠 / 임브베의 연대와 우노켄비 연대의 주력부대)가 서쪽에서 영국군의 배후를 강습하여, 야영지 텐트를 유린했다. 이 공격에 의해 영국군의 진형은 붕괴되어, 이산들와나를 지키던 대영제국 수비대는 역사적으로도 특필될 정도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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