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나의 쇼와사》p. 157~174를 번역한 글입니다.
아들의 죽음
어느 사이에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장남) 나가시는 노동금고 전무 겸 공제이사장이란 중직에 앉아, 밤낮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손녀) 미호코도 건강히 일하고 있다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된 스기노하라 카츠히코杉之原勝彦 군과 결혼하게 되어, 쇼와 52년(1977) 1월 14일에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치르기로 예정이 잡혔습니다.
1월 8일, 스기노하라 집안의 친척순례를 끝낸 날 오후 3시, 돌연히 "아버지가 쓰러졌다" 는 전화를 받고 나는 함께 협력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회의 도중에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져,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내가 갔을 때에는 조금 의식은 남아 있었으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병원의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도 헛되이, 아들은 12일 오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돌연한 죽음,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장례는 회사장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만, 불쌍한 건 미호코. 결혼식은 중단되었고, 결국은 생략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당시 77세, 어째서 연로한 어머니를 남기고 떠나버린 걸까요. 며느리와 손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40일 정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재봉용 바느질판의 위에 올려진 기모노에는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습니다. 미호코는 즉시 스기노하라 가문에 입적하고, 나도 미호코와 함께 가기로 되어, 오타미乙多見에서 거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삶
사는 데 익숙해진 츠시마의 아파트에선 떠나게 되었습니다. 11년이나 살았기에 친구들도 많았고, 집 주인분은 마치 피가 이어진 가족처럼 잘해주셨기에, 이사하는 건 대단히 괴로웠습니다. 이웃의 모든 같은 연배들은 이례적으로 송별회를 열어주었고, 떠나는 날 아침에는 모두가 배웅해 주었습니다.
또다시 알지 못하는 토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만, 손녀 부부가 내게 너무 잘 해주었고, 스기노하라의 양친도 여러가지로 도와 주섰기에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당분간은 재봉작업을 했습니다만 심장이 조금 나빠진 이후로는 남이 할 만한 일은 모두 그만두고, 좋아하는 자수를 하며 느긋하게 살고 있습니다. (집 앞에는) 약간의 공터도 있기에, 좋아하는 꽃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쇼와 55년(1980) 9월 2일, 증손자가 태어났습니다. 건강한 남자아이로 마사시將司라 이름짓고, 축제 분위기인 일가족들 사이에서 나도 대단히 기쁜 마음이 들어서,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게 되자 그 보육을 맡았습니다. 수유 / 기저귀 세탁 등은 상당한 중노동이었습니다. 다음 해 5월 5일, 아이의 하츠셋쿠(初節句, 태어나서 처음 맞는 명절) 날, 나는 갑자기 요통이 심해져 결국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스기노하라의 할머니가 아이를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하러 가는 양친과 함께 출발하여 남쪽에 사는 조부모의 집에 맡겨졌다가, 밤에 함께 돌아오게 된 거죠.
지금도 걱정은 진행중입니다. 벌써 소학교 2학년. 장난끼 많고 응석받이인데다 울보이기까지 합니다만, 학교성적은 상위권이라 크게 장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식 귀여운 줄밖에 모르는 걸까요. 그래도 '아이들은 태양' 이라 그 덕분에 집안은 명랑해지고, 내게 있어서도 그 존재는 살아가는 희망, 정말로 기쁜 존재입니다.
갈수록 다리와 허리는 약해지고 있습니다만 심장발작도 없었고, 의약醫藥과 친해져 가면서도 읽고 쓰는 것 / 자수에 의욕을 불태우며, 여생의 나날을 의의 깊게 보내고 있습니다. 야구를 좋아해서 매일 즐겁게 TV로 시청하곤 합니다. 소란스럽던 쇼와昭和도 이제는 안정을 되찾아, 문화의 발달과 함께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헤쳐나온 내게도 드디어 행복이라는 것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내 나이 87세. 남은 인생은 얼마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주변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승천하면 좋겠다고 염원 중입니다.
덧글
그래도 마지막에는 웃으며 눈을 감으셨기를 바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