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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1호(2002년 2월호) 152~159쪽의 기사로 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 씨께서 집필하신《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를 번역한 것으로, 노부나가, 히데요시를 섬기며 카가 / 노토 / 엣츄 3개 지방을 봉토로 받아 막부 말기까지 존속한 카가加賀 마에다 번 119만 석(에도 시대 봉건제후 중 1위)의 시조가 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일대기를 다루었습니다.

  잡지 발간시기를 보고 눈치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2002년 방영된 일본 NHK 대하드라마《토시이에와 마츠》방영과 함께 쓰여진 글입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결전

  나고야名護屋에서 돌아온 토시이에는, 한동안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도 서로의 저택에서 다회茶會를 벌이는 등 친밀한 관계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의 교류에 이르면 노能에 다회에 궁궐 입궐까지, 거론할 공간이 모자랄 정도다. 자택에서 자고 간 일도 여러 번 있었던 모양이다.

  분로쿠文祿 3년(1594) 요시노芳野에서 행해진 꽃놀이에선 가회歌會에 참가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이것은 국내에선 일단 평화가 찾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해 7월, 토시이에는 영지인 카나자와金澤에 있었던 카나자와 고보(金澤御坊, 카나자와에 세워진 잇코종 본산의 별원)의 재건을 허락하는 표찰制札을 내걸었다. 과거에 고배를 마시게 했던 잇코종 신도一向衆들도 이제는 무해한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관위는 종 2위 곤다이나곤權大納言에 이르러, 어쩌면 이 시기가 토시이에에게 있어서 가장 안온한 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해인 분로쿠 4년(1595) 2월, 아이즈會津의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가 병으로 죽고, 이어서 고리야마郡山의 야마토 주나곤大和中納言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保, 간바쿠關白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친동생)가 변사變死했다. 오다 가문 시대 이래의 맹우이자 차남 토시마사利政의 장인이기도 했던 우지사토는, 친 토시이에 파 무장으로써 함께 도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우지사토가 죽으면 히데요리의 장래는 끊겨버릴 것이다."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요시 정권의 차세대를 담당할 만한 인재들이 잇따라 죽어간 데 이어, 그 다음에는 당시의 칸파쿠인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실각한 후 처형당하는 거대한 정변이 발생했다. 모반이 발각되었기에 주멸한 것이라고 발표되었으나, 히데요시가 어린 장남 히데요리秀賴를 확실히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강제적으로 배제했다"는 의혹이 농후했다. 非 무사계층 출신으로 자식과도 인연이 없었던 히데요시가 정력을 다하여 쌓아올린 친족집단은 이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한 사람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여러 영주들이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청문(起請文, 서약서)를 제출하고, 히데이에 / 토시이에 / 이에야스 /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을 중심으로 하는, 히데요리 보좌를 위한 새로운 체제가 발족함으로써 당장은 사태가 진정되었으나, 노령에 접어들어 지신의 건강에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위탁할 만한 튼튼한 조직을 짤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거기에는 물론, 토시이에가 있었다.

  케이쵸 3년(1598) 토시이에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 토시카쓰利勝)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히데요리의 훈육자라는 큰 임무에서는 해방되지 못했다. "은거隱居" 란 영지경영을 토시나가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교토에 머물며 히데요리의 훈육에 전념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훈육자로써 토시이에에게 부과된 서약사항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았는데, 사실 훈육필두의 입장에 놓인 결과 토시이에 자신도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몸상태의 이상을 일으킨 건 토시이에뿐만이 아니었다. 그 해 7월, 죽을 때가 됐음을 깨달은 히데요시는 통칭 다섯 다이로(五大老, 도쿠가와 이에야스 / 마에다 토시이에 / 모리 테루모토 /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 / 우키다 히데이에)와 다섯 부교(五奉行,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라는 최고기구를 제정한다. 이는 히데쓰구 사건 이후 점차 구축되어 왔던 "히데요리의 보좌와 그 권익 준수를 서약한 유력영주들에 의한 통치체제" 를 새로이 제도화한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최고기구가 어디까지나 히데요리라는 전제적 군주를 초점으로 조직된 것으로, 그 결과 위 기관은 재편성되지 못하고, 기존의 체제 유지에 못박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배제하기는 커녕, 그 세력을 삭감하는 것조차 성취하지 못했던 이에야스라는 위협적 존재는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아직도 최대의 경계요소였음이 틀림없으나, 이 시점에서는 그가 대단히 협력적이고 우호적이었기에 장래에 우려할 만한 문제는 아무것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서도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굳이 두드러진 경계망을 준비하지 못한 채로 합의제라는 애매한 결정기관을 창설하는 걸로 귀착시킬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토시이에는 결국 정식으로 정권의 중추부에서 그 지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에야스와 맞설 만한 입장이었냐면 그건 "아니오" 이다. 두 사람은 흔히【 다섯 다이로의 필두 】라고 일컬어지지만, 이는 토시이에와 히데이에가 오로지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고, 이에야스 등 3명은 사법을 담당한다는 조직구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각각의 담당책임자가 토시이에와 이에야스였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종류 / 같은 정도의 권력을 가진 "쌍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당시 이에야스는 정 2위 나이다이진內大臣, 고쿠타카石高 250만 석. 토시이에는 종 2위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가문 고쿠다카를 다 합쳐도 76만 석 정도로, 누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드립니다. 다섯 분(다섯 다이로)들께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건 다섯 명(다섯 부교)에게 일러 놓았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다섯 분(다섯 다이로)에게, 거듭해서 자기 아들의 장래를 부탁한다는 게 텐카비토天下人의 마지막 말이었다. 케이쵸慶長 3년(1598)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었다. 향년 62세.

  다음 해인 케이죠 4년(1599) 정월, 토시이에는 병환이 난 몸을 억누르며 새해 축하 의례에 출사하여, 히데요리를 안고 착석했다. 여러 영주들이 마치 토시이에에게 절을 하는 듯 보이는 이 모습은, 과거 오다 가문의 유신들과 대면할 당시 히데요시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히데요리 옹호를 전면에 내건, 토시이에의 결의표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권탈취를 위한 이에야스의 준동은 신년이 되기도 전에 이미 개시되었다. 다섯 다이로 / 다섯 부교와 합의하지 않은 채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와 같은 유력무장 내지는 히데요시가 키워낸 영주들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에야스를 제외한 네 다이로와 다섯 부교는 유훈 위반이라며 잘못을 추궁했으나, 이에야스는 교묘히 충돌을 피하고, 때로는 말끝을 잡으며 공갈까지 했다고 한다. 약정을 깨트리면서도 처벌을 받지 않고 넘어간 건 바로 다섯 다이로 / 다섯 부교 제도 그 자체를 형해화시키는 것이다. 토시이에의 병환 악화는 세간에서도 수군댈 정도로 심각했기에, 어쩌면 이에야스는 이로써 저항 없이 도요토미 정권에서 탈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태는 분규紛糾하였다.

  그 날 중, 이에야스와 토시이에의 밑에 각자 다수의 영주들이 집결하여 즉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들이 뒤에서 분주하였기에 소동은 가라앉았으나, 이로 인해 뜻밖에도, 대립하는 두 파벌의 존재와 그 구성원들이 명확해졌다. - 그것은 두 사람이 가진 패가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후시미의 이에야스 밑에 모인 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 쿠로다 죠스이黑田如水, 나가마사長政 /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 모리 타다마사森忠政 /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樂齋 /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 신죠 나오요리新庄直賴 / 아리마 노리요리有馬則賴들이 집결.

  반면 오사카의 토시이에 밑에 모인 자들은 우에스기 카게카쓰 / 모리 테루모토 / 우키다 히데이에의 세 다이로와 이시다 미쓰나리 이하 다섯 부교 전원,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 호소카와 타다오키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 이와키 사다타카岩城貞隆 등 다수의 영주들이 달려왔다.

  그것은 이에야스의 오산이었을까.

  나머지 4대로 / 5봉행은 그렇다 치고, 지방의 유력영주들과, 미쓰나리와 같은 관료파와 격렬히 대립하고 있던 무단파武斷派의 무장들까지 주저없이 토시이에 밑에 집결하였다. 히데요시가 남긴 유신遺臣들은 예상 외로 단결력을 보여준 것이다. 토시이에 최후의 진용은, 의외로 호화로웠다. 이에야스는 서약서를 제출해, 정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이 소동으로부터 거의 2개월 후인 윤 3월 3일, 토시이에는 죽었다. 사건종결 이후 토시이에는 2번 이에야스와 만났는데 두 번 모두에 걸쳐, 토시이에가 이에야스 암살을 계획했으나 미수로 끝났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토시이에의 독단이었다고도, 히데요시가 남긴 명령이었다고도 하나, 이 사건은 진위를 포함한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
 

  거대한 신의의 무사

  토시이에가 죽은 바로 그 날, 이시다 미쓰나리는【 무단파 】의 무장들의 습격을 받고 이에야스의 저택에 은신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쓰나리의 발언력은 사라졌다. 마에다 토시나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 암살혐의를 뒤집어 쓰고, 이에야스의 군문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 가문은 즉각 구심점을 잃고서, 다음 해인 케이죠 5년(1600)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패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내놓게 된다.

  이에야스의 행동과 그 성취는, 그만큼 토시이에의 존재가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토시이에의 죽음에 의해 도요토미 가문은 분열되었고,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의 지배하에 놓였고, 도요토미 가문은 몰락한 것이다. 물론 토시이에는 관위도, 고쿠다카도, 도요토미 가문 내에서의 입장도 이에야스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62년의 생애를 통해 얻은【 그 이외의 것 】이 의외로 크게 작용한지도 모른다.

  행정관으로서의 활약이 보이게 된 이후로, 이해관계를 벗어나 행동하는 토시이에의 모습을 우리들은 볼 수 있다.【 오다와라의 진 】에서 항복한 무장들에 대한 처치가 관대한 나머지,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근신 중의 가토 기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로 오해가 풀렸으며, 아사노 나가마사는 히데쓰구 사건 당시 혐의가 씌워졌던 걸 토시이에에 의해 구해진 사람이다.

  가모 우지사토의 말이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건, 이에야스가 아닌 토시이에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때, 거기에는 수많은 숫자가 들어간다. 비교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종 2위 곤다이나곤, 카가 100만 석의 시조. 이것이 토시이에가 남긴 숫자이다. 그러나 토시이에는,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는 종류의 재산에 의해 지탱되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신뢰 】와 같은 것 말이다.
 

● 참고문헌

《신쵸코우키信長公記》(카도카와쇼텐角川書店)
《부코야와武功夜話》(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來社)
《칸세이쵸슈쇼가후寬政重修諸家譜》
  続 군쇼루이쥬 완성회《번 역사대사전藩史大辭典》(유잔가쿠雄山閣)
  이와사와 요시히코岩沢愿彦,《인물총서 마에다 토시이에》(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克広,《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덧글

  • 재팔 2014/05/31 23:59 # 답글

    그래도 뭔가 이에야스에 비하면 적수가 되긴 힘들었을 거 같애요. 인망 덕분에 아군이 많은지라, 이에야스가 고생 좀 했겠지만요..
  • 3인칭관찰자 2014/06/01 10:07 #

    확실히 이에야스와는 달리 토시이에 쪽은 온갖 무장들이 다 모인 연합체다 보니 일사분란하게 통일된 움직임을 보여주기는 힘들었을 것 같네요. 일단 이에야스 공격을 위해 뭉치기는 했지만 사건이 사그라들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저도 그래서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생은 확실히 더 많이 했겠지만요.
  • windxellos 2014/06/01 12:30 # 답글

    비록 취약점은 있었다 하더라도 토시이에가 이끄는 세키가하라였다면 전황이 바뀌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에야스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건곤일척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겠지만요.
  • 3인칭관찰자 2014/06/01 15:04 #

    제 생각엔 일단 이에야스가 잠잠해지고 시간이 지난다면 5대로나 5봉행, 내지는 유력영주 사이에서 새로운 불씨가 생겨나(무단파나 관료파의 대립과는 또 다른)새로운 내분으로 번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거대세력을 막기 위해 다른 영주들이 연합하는 경우 의외로 단결이 잘 안되고 각개격파당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요(노부나가 포위망이라든가 다테 마사무네 포위망 같은)
  • Oda 2014/07/18 14:13 # 삭제 답글

    토시이에가 이에아쓰 만큼 살았으면, 세키가하라 전투 양상이 달라질 수 있었겠네... 이 시기에 도쿠가와 에에야스를 선택한 쿠로다 간베에는 식견이 탁월하다 볼 수 있겠죠.
  • 3인칭관찰자 2014/07/18 18:34 #

    쿠로다 칸베에야.. 괜히 천재군사라고 미화되고 드라마까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히데요시의 군사이니 어쩌니 하는 문제는 제쳐 두더라도, 당대의 일본무장들 중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건 맞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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