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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1호(2002년 2월호) 152~159쪽의 기사로 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 씨께서 집필하신《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를 번역한 것으로, 노부나가, 히데요시를 섬기며 카가 / 노토 / 엣츄 3개 지방을 봉토로 받아 막부 말기까지 존속한 카가加賀 마에다 번 119만 석(에도 시대 봉건제후 중 1위)의 시조가 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일대기를 다루었습니다.

  잡지 발간시기를 보고 눈치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2002년 방영된 일본 NHK 대하드라마《토시이에와 마츠》방영과 함께 쓰여진 글입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이번 글에서는 "대륙진출" 이라든가 하는 눈에 거슬리는 단어들이 말미 부분에 있을 것이니.. 적당히 필터링 부탁드립니다.)


《히데요시 정권 시대》

  천하평정

  시즈가타케賤ケ岳 전투 후,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영지의 절반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 주어졌다. 이에 의해 호쿠리쿠北陸에서는 나가히데를 총괄자로 삼고, 그 뒤를 토시이에 /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가 뒤따르는 지배체제가 성립하였다. 단지 이 서열은 나가히데에 대한 형식적인 우대로, 실질적으로는 나가히데와 토시이에의 역할에는 큰 격차가 없었고, 말하자면 제휴지배에 가까운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음 해인 텐쇼 12년(1584) 8월, 갑작스레 나리마사가 토시이에의 영지인 노토能登 하쿠이 군羽咋郡에 침공하였다. 그 해 4월 오와리尾張에서 거병한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연합군과 손을 잡고, 히데요시를 견제하기 위해 결기한 것이다. 토시이에와 나리마사,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알고 있는 자들간의 대전으로 전국戰局은 일진일퇴, 결착은 다음 해까지 나지 않았으나, 히데요시가 노부카쓰와 단독으로 강화한 후, 직접 토시이에를 구원하러 오자 나리마사도 항복했다. 옛 호로슈母衣衆들 간의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런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키타노쇼北の庄에 있던 니와 나가히데가 병으로 죽었다. 그 영지는 일단 장남인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가 상속했으나, 앞의 나리마사와의 싸움에서 저지른 군령위반을 책망받아 얼마 안 가 와카사若狹로의 전봉轉封을 명 받았다. 영지 내에 당면한 위기가 사라진 것도 관련이 있다 싶으나, 이 일련의 사건이 종결된 후, 히데요시는 후임 무장을 배치하는 대신 토시이에에게 나리마사와 나가히데의 정치적 지위를 몰아주고, 호쿠리쿠 지방의 통치를 일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가 노토 1개 지방과 카가 2군, 여기에 장남 토시카쓰利勝가 나리마사의 옛 영지였던 엣츄 지방 내의 3군을 새로이 하사받아, 부자가 합쳐서 3개 지방으로 판도를 뻗은 대영주로 비약하기에 이른다.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筑前守라는 호칭을 히데요시로부터 양도받고, 처음으로 조정의 관직을 받아 종 4위하 사코노에콘쇼쇼(左近衛權小將, 우코노에右近衛라고도 한다)에 취임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같은 세대 무장들에 비하면 대단히 늦은 임관이긴 했으나, 이것은 토시이에가 지금까지 계급사회와 유리되어 최전선의 현장에서 살아온 데 대한 보상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임관은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정권 아래 확실히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말을 바꾸어보면 이 때 히데요시로서는 토시이에와의 주종관계를【 보다 강고하고 보다 절대적인 】것으로 변혁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의 진출을 예정하고 있던 사정상 반석과 같은 접경지대 지배가 급했던 데다가, 드디어 성립한 이에야스와의 동맹관계로 사용가능하게 된 도카이도東海道도 사가미의 호죠 씨北条氏와의 관계상 그 이북以北으로는 기능할 수 없어, 여전히 호쿠리쿠로北陸路만이 간토나 도호쿠東北 지방의 영주들과 온갖 절충을 계속하는 생명선이었다. 토시이에가 내려받은【 접경 방위와 외교책임자 】라는 직함은 군사상 극히 중요했고, 히데요시가 베푼 수많은 후대厚待에는 그러한 배경이 반영되었는지도 모른다.

  텐쇼 14년(1586) 5월, 오래도록 대립하고 있던 우에스기 씨上杉氏의 당주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가 토시이에와 함께 교토로 입경, 히데요시에 대한 신종臣從을 서약했다. 토시이에는 일단 하나의 중책을 성취한 셈이다.

  도요토미豊臣 성을 하사받고 칸파쿠關白에 취임하여. 이에야스와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정권을 확립한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싸움을 개시했다. 토시이에도 그를 따라 싸움터를 전전했다. 텐쇼 15년(1587)의 큐슈 제압전에서는 병사 8천 명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가, 그 중에서 3천 명은 토시카쓰의 지휘하에 원정군에 참여했고, 토시이에 자신은 수비부대로써 교토에 남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때 오사카에서 토시이에와 마찬가지로 수비를 명 받은 게 히데요시의 조카 히데쓰구秀次였으므로, 토시이에에 대한 히데요시의 신뢰는 이미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텐쇼 18년(1590)의【 오다와라의 진小田原の陣 】에서는 홋코쿠 군北國勢의 총지휘자로써 우에스기 카게카쓰 /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들을 이끌고 고즈케上野 / 무사시武藏에 산재한 호죠 가문의 지성支城들을 공략하라는 명을 받아, 마쓰이다松井田 / 미노와箕輪 / 마에바시前橋 / 사노佐野 / 카와고에河越 / 마쓰야마松山 / 하치카타鉢形 / 하치오지八王子 등의 성들을 공략했다. 카게카쓰 / 마사유키라는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이들을 큰 과실 없이 통솔하고, 자신도 한 발짝도 밀리지 않는 활약을 보임으로써 면목을 약여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다와라 함락 후도 히데요시를 따라 오우로奧羽路를 북상한 토시이에는, 데와出羽 쇼나이庄內에서 니카호仁賀保, 츠가루津輕로 군대를 진격시켜 반항세력을 구축한 후, 영지로 돌아갔다. 이로써 천하는 통일되었다. 그 마무리 부분을,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모방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완수하게 되었다.


  신정권 속에서

  토시이에는 이러한 전투에 앞서,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무쓰陸奧의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 그리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게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복속을 권고하는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에 이은, 홋코쿠 외교의 연속이었다. 난부 씨와는 일찍이 맹약을 맺은 모양이나, 마사무네는 거듭된 재촉에도 응하지 않고 입경을 연기해오다가, 이【 오다와라의 진 】에 이르러 겨우(여기서도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정식으로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귀순을 표명하였다. 지각한 마사무네에 대한 심문을 토시이에가 담당했는데, 이는 북방 접경을 책임자는 임무의 일부였으리라.

  이 직후 전국이 평정됨으로써 토시이에의 임무도 종료되었으나 난부 / 다테 양 가문과의 각종 절충은, 이후로도 토시이에를 사이에 두고 행해졌다. 오사키大崎 / 가사이葛西 잇키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마사무네의 변명장을 넘겨받고, 훗날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와의 사이에 개입하여 조정역을 맡아주는 등, 그 활동은 단순한 상주자의 역할에 머물러있지 않다. 그리고 노부나오는 훗날【 나고야의 진名護屋の陣 】에서 "가미카타슈(上方衆, 교토 인근에 거주하거나 영지를 가진 영주들 / 그 부하들)와 접촉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나, 토시이에 님이 계신 곳은 찾아뵈려고 한다." 라는 편지를 적고 있어, 오슈 방면의 무장들에 대해선 천하평정 후에도 계속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모습이 엿보인다. 히데요시 밑에 속한 무장이 된 토시이에에게는, 이와 같이 연령 / 경험 / 신뢰를 살린 행정관으로서의 측면도 현저히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럼 정권 내부에서의 토시이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토시이에의 관위는 텐쇼 17년(1989) 4월에 우츄쇼(右中將, 우코노에콘츄쇼右近衛権中将), 다음 해인 텐쇼 18년(1590)에는 정 4위하 산기(參議, 종 4위하라고도 한다)로 올라갔으나, 같은 세대인 이에야스는 물론 도자마인 카게카쓰 /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내지는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 도요토미 히데쓰구와 같은 도요토미 친족들에 비해서도 그 승진은 대단히 늦고, 격이 낮다.

  이 시기 토시이에는【 보바이슈傍輩衆 】라고 불리는 히데요시의 옛 동료들을 모은 무리에 속하여, 그 중에서는 최상급의 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나, 보바이슈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과 같은. 히데요시가 직접 키워낸 무리들과 동류에 놓이는 정도의 '명예직'에 지나지 않아, 정권 내부에서 커다란 발언력을 가진 부류의 계급이라곤 하기 힘들다. 동시대의 식전 석차나 편지의 분류로부터 추측해 볼 때, 토시이에는 히데요시 친족들, 오다 / 도쿠가와 씨, 우에스기 / 모리 씨와 같은 대영주의 뒤를 따르는【 차석 】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각료에는 이르지 못하는, 아직 고참 의원 내지 고급 관료계급에 있던 것이다.

  한편 히데요시 개인과의 교류는 깊어졌고, 텐쇼 15년(1587)에 벌어진 키타노北野의 대다회大茶湯나 텐쇼 16년(1588) 덴노天皇의 쥬라쿠 행행聚落行幸과 같은 국가적인 특별행사에는 물론, 히데요시 개인의 매사냥이나 입궐에도 함께 참여하는 모습이 보이게 된다. 토시이에의 3녀 마아가 히데요시의 첩이 된 사정도 있어서, 비공식적인 장소에서도 교분을 가질 기회가 늘었을 것이다. 히데요시와 토시이에가 젊었을 때 친했다는 말은 미지수, 라고 앞에서 적었으나, 적어도 이 시대 이후에는 대단히 친하게 지냈고, 다른 영주와는 질을 달리하는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드디어 염원의 대륙진출을 실행에 옮긴다. 텐쇼 19년(1591) 8월, 히젠肥前 나고야 성의 축성이 개시되었고, 다음 해인 텐쇼 20년(1592) 3월에는 신속히 교토에서 제장들이 출진에 나섰다. 1진이 토시이에 / 2진이 이에야스 / 3진이 다테 마사무네라는 편제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와 함께 나고야의 진중에서 전황을 관망하고 있었으나, 서전에서의 화려한 전과가 보고될 때는 히데요시 자신도 바다를 건너겠다(조선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야스와 토시이에의 거듭된 만류에 의해 이는 회피되었으나, 이 때 히데요시의 설득에 나선 것이 이에야스와 토시이에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 직후인 7월, 친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의 죽음으로 인해 히데요시가 일시 교토로 돌아갔을 때 나고야의 정무를 담당한 것이 이에야스과 토시이에이므로, 이 시기 토시이에는 이에야스와 맞먹는 발언력을 가졌거나, 내지 큰 일이 터지면 히데요시의 대행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텐쇼 19년(1591) 1월 세이케(淸家, 역주 : 셋카摂家 다음가는 쿠게公家 가문의 등급. 다죠다이진太政大臣까지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히데요시 득세 이전엔 코가久我 / 산죠三条 / 사이온지西園寺 / 토쿠다이지徳大寺 / 가잔인花山院 / 오오이노미카도大炊御門 / 키쿠테이菊亭 이상 7개 귀족 가문이 여기에 속했으나,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이후 무사 계층 가운데 토쿠가와徳川 / 모리毛利 / 코바야카와小早川 / 마에다前田 / 우키타宇喜多 / 우에스기上杉 가문이 세이케가 되어, 훗날 이들을 주축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다섯 다이로五大老가 구성된다.)에 준하게 되어 우에스기 가문 등과 동격의 대우를 받게 된 토시이에는, 조선출병에 앞서서 히데요시의 오토기슈(御伽衆, 말동무 벗)로도 임명되었다. 공사公私에 걸쳐 수많은 곳에서 히데요시의 측근이라는 것을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해 1월, 히데요시의 동생인 다이나곤大納言 히데나가가, 이어서 8월에는 히데요시의 친아들 쓰루마쓰鶴松가 죽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핏줄로 이어진 보좌관과 후계자를 잃은 히데요시 정권이,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이, 신뢰할 만한 인물을 필요로 한 끝에 내린 인사였다고 추측된다.

  분로쿠 2년(1593)에는 토시이에 자신도 조선으로 건너가, 가모 우지사토와 함께 군대의 지휘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강화의 체결로 인해 이 계획은 중지되어, 토시이에가 실제로 전투를 벌이는 일 없이 싸움은 종결되었다. 이것이【 창의 마타자 】로 불리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마지막 전진戰陣이었다. 이후 케이죠慶長의 역(정유재란)에서 토시이에는 참진하지 않았으며. 이 무렵 그는 영지 내에서 또 하나의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덧글

  • 제르진스키 2014/05/31 08:17 # 삭제 답글

    일본 유학시절, 많은 동료나 연구원들이 '마에다가 살아있었다면 세키가하라의 도쿠가와 승리는 없었다'라고 이구동성 이야기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도요토미의 전략참모였던 구로다 칸베에(구로다 나가마사의 부친)를 비롯해 적어도 양식있는 지장들은 조선파병과 명정벌에 회의적이었고, 참전해서도 방어적 또는 소극적 자세를 취한 사료가 간간이 보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14/05/31 10:01 #

    토시이에가 살아있었다면 그 인맥과 역량으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 내의 '무단파'와 '문치파' 사이의 갈등이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진 않았겠지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한 무장들 중에서도 토시이에가 살아 있었다면 이에야스에게 붙지 않았을 자들이 제법 있어 보이기도 하고..

    말씀하신 대로 지장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라면 그리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지 않았겠지요.(단지 그들을 전쟁터에 내몰고, 열심히 싸우지 않는 자들을 견책하거나 때로는 영지까지 몰수하는 히데요시를 의식해야 했기에 열심히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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