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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1호(2002년 2월호) 152~159쪽의 기사로 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 씨께서 집필하신《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를 번역한 것으로, 노부나가, 히데요시를 섬기며 카가 / 노토 / 엣츄 3개 지방을 봉토로 받아 막부 말기까지 존속한 카가加賀 마에다 번 119만 석(에도 시대 봉건제후 중 1위)의 시조가 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일대기를 다루었습니다.

  잡지 발간시기를 보고 눈치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2002년 방영된 일본 NHK 대하드라마《토시이에와 마츠》방영과 함께 쓰여진 글입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호쿠리쿠北陸 방면군 시대》

 
  1개 지역을 통치하기까지의 과정

  텐쇼天正 3년(1575), 에치젠越前 잇코잇키(一向一揆, 역주 : 이시야마 혼간사로 대표되는 잇코종파 신도들을 주축으로 일어난 무장봉기 내지는 그로 인해 만들어진 체제)를 일단 진압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지역 분배에 착수, 에치젠 12군十二郡 중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8군, 무토 기요히데武藤舜秀에게 1군, 오노 군大野郡의 3분의 2를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3분의 1을 하라 나가요리原長賴에게 주었다. 토시이에도 -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 후와 미쓰하루不破光治와 3명이서 나눠 가지는 영지이긴 했으나 - 후츄府中에 2군을 하사받았다. 이들이 후츄 3인중으로 불리게 된 건 이 시기의 일이다.

  에치젠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옛 영지는 당초엔 오다 가문에 투항한 아사쿠라의 옛 신하들이 통치했으나, 계속해서 일어나는 잇키와 그들 사이의 내분에 의해 체제가 와해되어 버렸기에 다시 잇코세력을 쓸어버리고서, 통치기구로 기능하면서도 이 지역을 거점으로 호쿠리쿠 방면에 대한 군사행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을 파견한 것이다.

  토시이에는 이로 인해 노부나가의 친위대에서 이리로 전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항복한 무장인 무토 기요히데를 제외하면 방면군 집단의 우두머리旗頭인 가쓰이에의 요리키與力로 배치된 무장들은 도시이에를 포함한 모두가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호위 기마무사)에서 선발된 직속신하들로, 군사적으로는 가쓰이에의 지휘하에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노부나가에 직속된 관료적인 성격을 띤【 감독관目付 】적 존재였다. 에치젠에 배치된 후에도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셋츠攝津 아리오카 성有岡城 공격과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 공격에 원군으로서 참가하였던 듯 하여. 아직 광의의 의미로 보면 친위대에 포함된다고 위치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토시이에는 가쓰이에 밑에서 호쿠리쿠 방면군의 일원이 되어 오다 가문의 영토확대 싸움을 전개했으나, 이 지방은 잇코종 세력이 뿌리깊게 침투한 지역인 점도 있어서 그에 따른 저항이 예상되었다. 토시이에들이 에치젠에 봉해짐과 동시에, 카가加賀에서도 전선부대로서 야나다 히로마사梁田廣正를 우두머리로 한 또 하나의 방면군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야나다 군梁田軍은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결탁한 잇코종 무리의 끝없는 봉기에 시달려 전혀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초조해하던 노부나가는 텐쇼 5년(1577) 가쓰이에 군단에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 타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 / 미노 3인중을 합한 대군단을 카가에 투입시켜 강습공격에 의한 결착을 획책했다. 그러나 가쓰이에의 지휘하에 놓인 히데요시가 가쓰이에와 대립한 끝에 멋대로 철수해 버리는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戰局은 예상 외로 헛도는 양상을 보이다 결국에는 테도리 강 전투手取川の戰い에서 우에스기 군에게 참패를 당하는 결과가 났다.

  이후로도 카가 전선에는 상당한 곤란이 예상되었으나, 텐쇼 6년(1578) 적장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병으로 죽은 후 우에스기 가문에 내란이 발발했기 때문에 사태는 호전되어, 우선 카가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노토能登 / 엣츄越中까지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적군을 쓸어낸 지역에 순차적으로 영지가 할당되어, 우선 텐쇼 8년(1580) 11월에 가쓰이에가 카가를, 텐쇼 9년(1581) 2월에 나리마사가 엣츄를 (하사받고), 그리고 그 해 10월에 토시이에에게도 노토 지방이 주어졌다. 토시이에는 드디어 한 지역을 지배하는 영주의 대열에 오른 것이다.

  노토 지방을 다스리게 된 토시이에의 나이는 44세. 오다 가문의 다른 유력한 무장들에 비하면 결코 빠른 출세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이 시점에서나마 그럭저럭 1개 지방의 지배권을 획득한 의미는 대단히 컸다. 얼마 안 가 역사는 크게 변하게 된다. 텐쇼 10년(1582) 6월 2일은, 반 년밖에 남지 않았다.

 
  오다 가문 괴멸

  혼노사 정변本能寺の變으로 노부나가와, 그 장남이자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가 살해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호쿠리쿠 방면군의 제장들은, 엣츄 마쓰쿠라 성松倉城의 포위를 풀고 철수를 개시했다.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잇키 세력에 맞서 토시이에와 나리마사는 자기들의 영지를 지키고, 가쓰이에는 조카인 사쿠라 모리마사佐久間盛政에게 영지의 수비를 맡긴 후 오미近江까지 진격했으나, 이미 야마자키山崎의 전투(역주 :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에게 승리한 전투)는 종결나 있었다.

  노부나가 / 노부타다를 잃은 오다 가문은 키요스 회의에서 노부타다의 장남 산보시마루三法師丸를 오다 가문의 정통한 후계자로 결정함으로써 일단은 질서를 회복했으나, 주군의 복수를 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히데요시는 그대로 쿄키(京機, 교토와 그 인근지역)에 머물며 착착 노부나가의 옛 신하들을 포섭하여 자기세력을 확대하는 데 착수했다. 한편 이에 반발하는 자들은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信孝를 옹립한 가쓰이에에게 마음을 기대기 시작한다.

  노부나가가 창설한 5개 방면군 중에 이 시점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건 히데요시의 주코쿠 방면군과 가쓰이에가 통솔하는 호쿠리쿠 방면군으로 좁혀져, 오다 가문의 적류인 산보시마루와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를 옹립한 "밑바닥에서 올라온 히데요시" 와, 후계자로서의 자질은 갖추었으나 (노부타다 / 노부카쓰와) 어머니가 달랐던 3남 노부타카를 옹립한 "오다 가문 역전의 무장 가쓰이에" 의 대립구도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명확해진 건, 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그러나, 가쓰이에는 히데요시와 충돌을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일촉즉발의 불온한 상황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텐쇼 10년(1582) 11월 토시이에는 가쓰이에의 명령을 받아, 같은 에치젠의 무장인 카나모리 나가치카 / 후와 나오미쓰不破直光와 함께 히데요시를 찾아가 야마시로山城 지방 타카라데라寶寺에서 화해를 하였다. 토시이에가 사신으로 발탁되게 된 건 우선 옛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라는 입장에서였을 것이다. 엄밀하게는 가쓰이에와의 사이에 주종관계를 맺지 않은, 말하자면 중립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마에다카후前田家譜》에 의하면 특사로 토시이에를 기용한 것은【 토시이에와 히데요시의 인척관계를 이용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여기서 토시이에를 중심으로, 가쓰이에 /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정리해 두자.

  가쓰이에는 분명 직속상관은 아니었으나, 에치젠에 봉해진 무장으로써 고락을 같이해 온, 문자 그대로의 전우였고, 토시이에가 "아버님" 이라고 부르며 경애한, 형님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던 것 같다. 가쓰이에는 한때 로닌浪人의 신분으로 전락한 토시이에를 옹호하여, 그 때문에 오다니 성小谷城 전투에서 토시이에가 몸을 던져 가쓰이에의 위기를 모면해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노부나가에 의한 호쿠리쿠 방면군의 인선에는, 어쩌면 이와 관련한 사정도 고려되었을지 모른다.

  한편 히데요시와는 무장으로서의 접점은 희박했으나, 이 시점에서 토시이에의 넷째 딸 고우豪와 여섯째 딸 키쿠菊가 히데요시의 수양딸이 되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인척간이었다. 단지 항간에 전해지는 것처럼 "토시이에와 히데요시는 젊은 시절부터 친했다" 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료를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젊은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으며, 두 딸을 수양딸로 보냈다는 점에서 추측하면 사이가 나빴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오히려 양녀관계를 계기로 두 사람의 친교가 깊어졌다고 생각하는 쪽이 타당하다는 느낌도 든다. 지위도 근무지도 달랐던 양자의 사이에, 만약 깊은 우정을 길러낸 시기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10대의 아주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을 넘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교섭에 임하였던 시점에서, 지금까지 에치젠 후츄까지 전진해 놓았던 군대를 물리게 하였다. 이는 히데요시라는 남자의 본성을 잘못 읽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겨울이 찾아와 눈이 쌓이면 가쓰이에가 군대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약점을 확인한 히데요시는, 아무런 명분도 밝히지 않은 채 5만 군대를 이끌고 시바타 가쓰토요柴田勝豊가 지키는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항복을 받은 후, 즉시 기후 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습격하여 이 쪽도 성문을 열게 하고, 다음해인 텐쇼 11년(1583) 2월에는 이세伊勢의 타키가와 카즈마스 공략을 개시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제압당한데다 "마음을 같이하는 자들" 이 각개격파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가쓰이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인솔하여 북 오미北近江로 출진했다. 4월 20일, 양군은 시즈가타케賤ケ岳에서 격돌한다.

  노부타카와 카즈마스가 기후에서 거병하여 히데요시의 본대를 묶어놓는 사이에, 사쿠마 모리마사가 히데요시 편의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淸秀가 지키는 오오이와 산 요새大岩山砦를 기습하여 합락시키고, 이어서 이와사키 산 요새岩崎山砦의 장악에도 성공하여, 전초전은 시바타 군이 우위에 선 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두 요새의 함락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경이적인 속도로 오가키大垣에서 병사들을 회군시키고, 키노모토木之本에서 군대를 집결시켜 사쿠마 군에게 반격을 개시했다.

  모리마사는 히데요시 군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병사들을 정비하기 시작했으나, 이 때 장남 토시카쓰(利勝, 텐쇼 15년 무렵부터 토시나가利長라고 칭하게 된다)와 함꼐 가쓰이에 편에 서서 참전하여, 사쿠마 군을 원호해야 할 위치에 진을 치고 있던 토시이에가 이끄는 마에다 군이 갑자기 전선을 이탈,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집중공격을 받게 된 사쿠마 군이 무너지면서 가쓰이에 본대도 패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후방에서의 붕괴" 에 의해, 자웅의 결전은 어이없이 판가름났다. 가쓰이에에게는 다시 병사를 수습할 여력도 없었기에, 키타노쇼北の庄에 돌아가 히데요시 군과 일전을 벌인 끝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패주 중에 많은 후다이 가신들을 잃고, 자기 신변에도 위험이 미치던 상황 속에서, 토시이에는 후츄 성府中城에 온 가쓰이에를 맞아들였으나, 가쓰이에는 어떤 힐문詰問도 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까지의 교우에 감사한다" 는 뜻을 표하고서,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라고 권유한 후 성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날 중으로 히데요시 군에게 포위당한 토시이에는 항복하고, 전투의 관례에 따라 가쓰이에 추격의 길 안내를 맡았다. 전투 후. 노토 지방의 지배를 그대로 인정받고, 거기에다 가쓰이에의 영지 중에서 카가의 2군을 가봉받았다.

  이 전투에서 토시이에가 전선이탈을 한 진의는 명확하지 않다. 히데요시와의 내통설은 그 당시부터 소문이 돌고 있었으나 확증은 없다. 딸들의 안전을 걱정했기도 했을 것이고, 히데요시로부터 권유가 온 것도 당연했으리라.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전투가 토시이에에게는 "처음으로 주체성을 요구받은" 일전이었다는 것이다. 절대군주인 노부나가를 잃음으로써, 말하자면 행동이념을 잃은 토시이에는 이 국면에서 히데요시의 야망에도, 가쓰이에의 도리론에도 자신감을 갖고 대응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주저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불식시킬 수 없다. 물론 이 일전만으로 평가를 내리는 건 이르지만, "토시이에는 좋든 나쁘든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아니 욕망을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 내지는 욕망이 없는 인간이다.." 고 하는 견해도 생길 수 있다.

  전후의 대우로 보는 한,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벌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후대한 것도 아니다. 히데요시는 간파하지 않았을까. 인물로서는 1류. 그러나 천하를 바랄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라고. 토시이에의 후반생은 이로서 결정되었다고 봐도 된다. 시즈가타케 전투는 이런 의미에서는 토시이에가 텐카비토天下人가 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결정한 분수령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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