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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1호(2002년 2월호) 152~159쪽의 기사로 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 씨께서 집필하신《마에다 토시이에 일대기》를 번역한 것으로, 노부나가, 히데요시를 섬기며 카가 / 노토 / 엣츄 3개 지방을 봉토로 받아 막부 말기까지 존속한 카가加賀 마에다 번 119만 석(에도 시대 봉건제후 중 1위)의 시조가 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일대기를 다루었습니다.

  잡지 발간시기를 보고 눈치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2002년 방영된 일본 NHK 대하드라마《토시이에와 마츠》방영과 함께 쓰여진 글입니다. 따라서 미화된 부분도 제법 있으리라 생각되기에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때, 거기에는 많은 숫자가 끼이게 된다. 객관적이며, 비교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종 2위 곤다이나곤權大納言, 카가 100만 석의 시조. 이것이 마에다 도시이에가 남긴 숫자로, 정석을 따라 토시이에를 평가한다면 이 한 마디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무장을 숫자만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그가 한 번도 독립조직을 갖지 못한, 평생 가신家臣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패자가 되려고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견제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장벽이 된 것은 이 마에다 토시이에 하나 뿐이었다.

  그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지위, 이를 지탱하는 배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노부나가 측근시대》

  노부나가와의 만남

  토시이에는 텐분天文 7년(1538), 오와리尾張 카이도 군海東郡 아라코 성주荒子城主 마에다 토시마사前田利昌의 4남으로 태어났다.(《칸세이초슈쇼가후寬政重修諸家譜》) 텐분 6년(정유년, 1537)에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텐분 5년 출생이라고도 한다)와 동갑이었다는 사료도 있으나 확증은 없다. 여기에서는 공식문서에 따라 텐분 7년생으로 추정하겠다.

  토시이에의 마에다 가문은 2천 관문 정도의 영지를 가진 소영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이치오토나一長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의 요리키(與力, 역주 : 유력한 무장들의 지휘를 받는 토착호족)로서《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 등장하는 마에다 요쥬로前田與十郞이라는 인물과 같은 계통으로 생각된다. 큰형 토시히사利久, 둘째 형 토시하루利玄, 셋째 형 야스카쓰安勝에 대해선 상세한 정보가 없으나, 4남인 토시이에는 텐분 20년(1551) 14세의 나이로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고, 맏동생 요시유키良之도 연대는 불명이나 거의 동시기에 사와키 씨佐脇氏의 양자가 되어 노부나가를 섬겼다.

  당초의 신분은 시동이었다고 생각되나, 입장상으로는 오와리 남부 4군을 장악하고 있을 뿐인 오다 야마토노카미織田大和守의 세 중신奉行 중 하나인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아들에게 붙여진 시동이므로 전도가 촉망받는 신분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어쨌든 토시이에 - 마에다 이누치요前田犬千代는 이로 인해 희대의 악동 오다 사부로 노부나가의 최초기의 직속 신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얼마 안 가 츠다 노부이에津田信家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 역주 : 무사 집안 남자가 성인식을 치를 때 모자의 일종인 에보시를 씌우고 이름을 정해주는 사람)로 성인식을 치렀다. 유명한【 마타자에몬又佐衛門 】을 칭하게 된 것은 에이로쿠 원년(1558) 이후이며 첫 이름은 마고시로 토시이에孫四郞利家였다.

  텐분 21년(1552) 카야즈萱津 전투에서 첫 출전을 장식하고, 코지弘治 2년(1556)의 이노稻生 전투, 그리고 에이로쿠永綠 원년의 우키노浮野 전투 등, 출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노부나가를 따라 전장을 왕래했다. 오와리에서는 노부히데(1552년 사망)가 죽으면서 탄죠노츄 가문彈正忠家의 상속 다툼을 중심으로 한 오다 가문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 보인 토시이에의 활약은 대단했고, 특히 노부나가가 친동생 노부카쓰(信勝, 노부유키信行)의 세력과 직접대결을 벌인 이노 전투에서는, 오른쪽 눈 아래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적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영지를 가봉받아, 부하들을 거느리게 된 토시이에는 에이로쿠 초년에 설립된 쿠로黑 / 아카赤 각각 10명씩 뽑는【 호로슈(母衣衆, 역주 : 영주의 본진과 전선부대를 오가는 연락장교로, 호로를 입혀 피아식별을 했다) 】에 아카호로슈의 필두로서 선발되었다. 쿠로 쪽은 우마마와리(호위 기마무사)에서, 아카는 시동 중에서 선출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이 조직은, 말하자면 노부나가의 친위대였다. 가신단이 두터운 시대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같은 시기에 노부나가를 섬긴 중신들 중에서도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건 확실할 것이다. 무장으로서는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에이로쿠 2년(1559),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도보슈(同朋衆, 주군을 섬기며 잡무나 차 시중을 드는 사람)인 쥬아미拾阿彌를 참살斬殺한 일로 노부나가의 노여움을 사, 출사를 금지당했다. 쥬아미가 토시이에의 코우가이(笄, 역주 : 칼집에 꽂아 넣는 도구)를 훔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노부나가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눈 앞에서 베어 죽였다고 한다.

  젊은 시기 토시이에는【 가부키모노(傾き者, 역주 : 색다른 기행을 벌이며 남의 이목을 끌었던 자) 】였다고 하나, 뒷받침할 설득력 있는 사료는 제시되지 않았다. 한 평생을 통해 오히려 이성적인 인격자로 평가받는 토시이에로서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군의 명령을 거스른 행동이었고, 좌절이었다. 이후 약 2년 간, 토시이에는 사실상 로닌浪人의 삶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노부나가의 신하로서는 물론이고, 무장으로서의 활동도 금지당했다.

  에이로쿠 3년(1560) 자주적으로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 참가하여 목 3개를 베는 활약을 했음에도 노부나가의 기분을 풀지 못했던 그는, 다음 해인 에이로쿠 4년(1561)에 벌어진 모리베森邊 전투에서 적장 아다치 로쿠베에足立六兵衛의 목을 베어 간신히 오다 가문으로의 복귀를 허락받았다. 이 전투는 노부나가 시대 미노에서의 첫 전투로, 미노 남부에 교두보를 쌓은 기념할 만한 일전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부나가는 오와리를 통일하고, 강적 이마가와 씨今川氏를 격파하고, 이제는 타 지역으로 진출하는 무장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축재築財의 시대

  한편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가 로닌이 되어 있던 에이로쿠 3년(1560) 7월에 아버지 토시마사가 죽고 큰형 토시히사가 가문을 상속하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12년(1569) 토시이에는 급작스럽게, 형을 대신하여 마에다 가문을 상속하라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았다. 토시히사가 병약하고 후계자도 없으며, 군역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토시히사가 전투에 참가한 흔적은 분명 보이지 않으나, 마에다 가문이 동원가능한 병사들을 과실과 태만 없이 파견하였더라면 닥쳐올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어디까지나 사견이지만, 이 사건이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하여 입경전을 개시한 다음 해의 일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토시히사가 파병에 적극적이지 않았거나, 작전 중에 지휘권을 둘러싸고 토시히사의 직속 신하들과 토시이에 사이에 충돌이 있었든가 하는, 무언가 불상사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지적할 수 있다.

  전선을 확대하고 있던 노부나가에 있어서,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가동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최우선 / 최중요과제였음은 확실하며, 이 대전제를 무시하면서까지 가신단의 분열로 발전할지 모르는 리스크를 무릅쓰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입경전 당시의 단계에서는 토시이에가 가문을 양도받을만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것도 감안하면, 이 처치는 토시이에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토시히사에 대한 징벌이 목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 추측을 뒷받침할 자료가 있는가에 대해선 언급을 피하겠으나, 노부나가의 명령에 불복한 토시히사와 슈쿠로(宿老, 가문 내의 중신) 오쿠무라 나가토미奧村永富는 저항하던 끝에 쫓겨나고 만다. 남은 2명의 형들도, 사료에서 그 이름이 발견되는 건 토시히사와 나가토미가 마에다 가문으로 돌아온 에치젠越前 시대 이후이므로, 같이 로닌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됐든 사태는 일단 수습되어, 토시이에를 정점에 둔 마에다 종가의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후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전에 종사하였다. 겐키元龜 원년(1570)의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 텐쇼 원년(1573)의 아사쿠라朝倉 추격전, 텐쇼 2년의 나가시마長島 잇코잇키와의 싸움, 텐쇼 3년의 나가시노長篠 전투 등에서 참전한 것이 사료로 확인되었는데, 그 외에도 노부나가가 출진한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고 생각된다. 이 시대 토시이에의 신분은 일관되게【 우마마와리 】로, 소규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부나가의 본진을 지키는 것이 주임무였다. 거기에다【 호로슈 】이기도 했기에 노부나가로부터 전선에 보내는 명령을 전달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명령을 준수하는지 감독하기도 했다. 강대한 권한을 가진 고참 직속장교라는 신분은 거물이라고 할 순 없었으나, 신속한 행동력과 임기응변의 판단력이 요구되는 직무를 수많은 전장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은 토시이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30세 전후라는 점도 한 몫하는데, 한 무장으로서, 내지는 지휘관으로서의 다채로운 활약이 전해지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는 패주를 시작한 오다 군 속에서 홀로 제방 위로 올라가 창을 휘두르며 전공을 세워 "제방 위의 창" 이라고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아사쿠라 추격전에서는 야음을 타고 철수하는 아사쿠라 군을 시바타柴田 / 사쿠마佐久間 / 히데요시秀吉와 같은 부장급 지휘관들이 보고도 가만히 있었기에, 스스로 추격을 개시한 노부나가를 따라 활약하여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토시이에가 참가한 전투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 나가시노 전투이리라. 이 전투에서 토시이에는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 노노무라 산쥬로野野村三十郞 / 후쿠토미 헤이자에몬福富平左衛門 / 반 쿠로자에몬과 함께 조총부대 지휘관鐵砲奉行을 맡았다. 그 전부가 호로슈 내지는 우마마와리(호위 기마무사)에서 선발된 얼굴들이므로, 지휘관奉行이라고는 하나 그 지위는 호로슈의 연장선상에서 일시적으로 임명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개개의 병사들의 능력을 근대적인 병기로 평준화하는 전술과, 그 혼성부대를 통솔하고, 견인하고, 유지하는 임무의 실정은, 이 전투에서 지휘관으로 싸워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고, 이후의 근대전에 필요한 지식이기도 했다. 토시이에는 다른 무장들보다 앞서서 차세대의 전술을 체험한 것이다.

  우마마와리 시대의 토시이에는, 우마마와리라는 지위가 그렇듯이 커다란 공적을 세운 적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크게 출세할 일도 없었으나, 노부나가의 총신이라는 명예를 확립하고, 노부나가의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노부나가의 눈 / 노부나가의 사고와 접해 나갔다는 점에서 귀중한 축재築財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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