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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테도리 강手取川 전투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9호(2001년 10월호) 50~65쪽의 기사인《우에스기 켄신 - 천하로의 대망》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년도는 1577년)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과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이끄는 오다 군이 카가에서 충돌한《테도리 강 전투》를 중심으로 다룬 기사로 저자는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씨입니다.(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기동력과 첨보능력이 결정지은 테도리 강 전투

  완만한 진격을 하던 오다 군에 비해, 우에스기 군의 진격은 신속했다. 9월 15일에 나나오 성七尾城을 공략한 켄신은 나나오에 아지사카 나가자네鰺坂長實를 남겨놓고 즉시 선발부대를 진격시켜, 17일에는 하타케야마 편이였던 스에모리 성末森城을 공략했다. 이 곳에는 측근인 사이토 토모노부齋藤朝信와 신루이슈(親類衆, 영주의 일가친척)인 야마우라 쿠니키요(山浦國淸, 역주 :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의 아들)를 남겨놓았다.

  노토를 평정한 우에스기 군은 다시 남하하여 카가로 들어가, 잇코잇키 세력과 합류했다. 켄신은 18일에 본진이 있던 세키도 산성石動山城을 출발하여 21일에 선봉과 잇코잇키 세력이 집결한 츠바타 성津幡城에 도착했다. 우에스기 군은 다시 진격을 계속하여 최전선인 마쓰도 성松任城에 들어간 것이 22일 무렵으로 추정된다. 거의 현대의 국도 8호선을 따라가는 듯한 진격으로, 그 진격속도는 하루에 30km 정도. 나흘간 연속으로 행군한 속도로서는 경이적인 수치이다.

  마쓰도 성에 집결한 우에스기 군은 3만 명에 이르렀다. 그 내역은, 케이죠慶長 시기의 켄지檢地에 따른 고쿠다카石高로 추정할 때 에치고 병사 8천 / 엣츄 병사 9천 / 노토 병사 5천 / 카가 병사 8천 정도가 아니었을까.

  오다 군에게는 위와 같은 우에스기 군의 움직임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9월 10일자로 보낸 연서장連書狀에는【 노토 나나오 성에서 스에모리 성에 이르는 도로가 잇키 세력에 의해 봉쇄되어, 나나오 성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 】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형편이 좋을 때는 가끔 나나오 성에서 오는 사자들이 있었으나, 스에모리 성이 함락된 후에는 그것조차 끊겨 버렸다. 켄신이 적의 정찰병을 남김없이 죽여서, 오다 군에게 일절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에이로쿠 4년(1561)의 제 4차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에서 치쿠마 강千曲川을 건넌 우에스기 군이 다케다의 정찰병을 모두 죽여서, 하치만바라八幡原에 있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에게 정보를 주지 않은 상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 한편으로, 켄신은 체진하고 있던 오다 군의 정황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선 짙은 안개 속에서 다케다 본진을 발견한 바 있었다. 켄신이 정찰, 즉 전장에서의 정보를 중시했던 것은 명확하다. 적에게는 정보를 주지 않고, 이쪽은 정보를 얻어서, 언제나 전장의 주도권을 잡는다, 이런 첩보능력의 차이가 켄신이 상승장군常勝將軍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적의 정보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오다 군이 켄신의 마쓰도 입성을 알게 된 것은 9월 23일이 되어서였다. 아마도 가쓰이에는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나나오 성이 함락되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노부나가가 가쓰이에에게 호쿠리쿠 원정을 중지하고 철수를 명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된다.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지휘하에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토벌의 군대가 출발한 것이 9월 27일로, 시기적으로도 합치한다.

  카츠이에는 즉시 군의軍議를 열어, 그날 안으로 현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완만한 진격과는 반대로 카츠이에는 신속히 결단했다. 이는 노부나가의 명확한 지시가 카츠이에에게 주어졌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카츠이에는 텐쇼天正 3년(1575) 노부나가에게 에치젠越前 경영을 위임받았을 때, "무슨 일이든 노부나가의 지시에 따라라." 는 통치법도를 부여받았었다. 노부나가를 두려워하고 있던 카츠이에는 히데요시秀吉과는 달리 스스로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작전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아마도 노부나가의 명령이 없었다면 언제까지나 테도리 강에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오다 군은 은밀히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련한 투장鬪將인 켄신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마쓰도 성의 망루에서 미즈시마를 한 눈에 보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카이즈 성海津城에서 피어오르는 취사연기의 차이만으로 다케다 군의 출진을 간파한 켄신이다. 이 때도 적진의 움직임을 보고, 직감적으로 오다 군의 움직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켄신은 전군에게 출격을 명령했다.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켄신은 다케다 군의 출진을 알아채고 선수를 쳐서 사이죠 산妻女山을 내려갔다. 그리고 테도리 강에서는 오다 군이 철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걸 보고 마쓰도 성에서 출격했다. 적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포착하고 임기응변으로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켄신이 득의로 삼는 전술패턴으로, 여기에서도 그랬다.

  예상치 못한 켄신의 출현에 오다 군은 동요했다. 이 때 오다 군의 포진은 테도리 강을 등진 배수진이었다. 보통이라면 배수진은 병사들을 죽을 각오로 싸우게 하는 효과를 낸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로 인해 진형이 허물어진 직후라,【 전투 】를 벌일 처지가 아니었다.
 
  여기서 전국시대의 행군과 전투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행군은 대장 한 사람이 이끄는 부대마다 조총 / 창 / 대장 / 기마부대의 순서대로 2열 전후의 종대를 짜서 진군했다. 그리고 전투合戰는 흔히 말하는 팔진八陳으로 대표되듯, 결전이 예상되는 지역에 양군이 행군하여 진형을 정비하고 노려보면서 그 직후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양군의 합의하에 벌어지는 싸움이었기에【 전투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당시, 군대가 행군상태에서 그대로 전투에 돌입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켄신의 군대는 달랐다. 켄신은 조릿대 지팡이를 휘둘러 대략적으로 군대를 구획지어 이를 전투단위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다. 우에스기 군의 전투시 편제는 상당히 대충 행해진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이런 대략적인 면이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뿐이다.

  여기서도 역시, 켄신이 득의로 삼는 전술 패턴이 출현했다. 적을 찾으면서 행군을 계속하여, 적을 포착하자마자 행군대형 그대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도 켄신은 정찰병을 뿌려 적정을 살피면서 안갯 속을 나아간 끝에 신겐의 군대를 발견하고 행군대형 그대로 전군이 돌격했다. 테도리 강에서도 역시, 행군대형 그대로 추격전이 벌여졌을 거라고 추측된다. 진형을 정비하지도 않고 공세로 나아가는 켄신의 전술은, 당시 전투에서의 암묵적인 룰을 무시한 것이었다.

  적에게 정보를 주지 않고 전장의 주도권을 잡으며, 적이 움직인 기회를 포착해 행동을 개시하고 적을 찾으면서 행군을 이어가, 적을 포착하면 지체없이 공격을 감행하는 이 기동전술이야말로, 우에스기 켄신이 득의로 삼은【 수레바퀴 회전(차륜진) 】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켄신은 적의 약점을 발견하면, 적이 포진을 정비하기 전에 급히 진격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가한다. 태세를 정비하지 못한 적은 포진할 틈도 없이 결전이 예상되는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농성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동력을 구사하여 적 부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붕괴시키는 것이 제 2차대전에서의 전격전이라고 한다면, 켄신의 기동전도 역시 일종의 전격전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카츠이에가 진을 친 곳에서 태세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곳은, 와다 산성和田山城을 중심으로 한 테도리 강 남쪽 강변밖에 없었다. 테도리 강은 연일 내린 가을비로 물이 크게 불어나, 강줄기가 흉폭해져 있었다. 이 땅에 익숙치 못한 오다 군은 강을 건너는 데 시간이 걸렸음이 틀림없다. 동요와 초조함, 이 두 가지가 오다 군을 싸우지도 않고 혼란상태에 빠뜨렸음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에스기 군이 습격해 왔는데, 우에스기 군은 이 땅에 익숙한 잇코잇키 세력을 길 안내역으로 삼아 진격했으리라. 켄신은 오다 군에게 공격을 할 필요도 없이 군대가 접근하고 있음을 느끼도록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우에스기 군의 내습을 알아챈 오다 군은 즉각적인 패닉상태에 빠져, 앞다투어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테도리 강은 흉폭한 강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의 강줄기가 어떠했는지는 지금에 와선 전혀 추측할 방법이 없으나, 오다 병사들은 탁류에 휩쓸려, 이로 인해 상실한 병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도망치는 데 늦은 병사들은 우에스기 군에게 도륙당했다. 그 수만 1천여 명이라고 한다.


  모리毛利와의 동서 협공을 계획했던 켄신

  오다 군을 격퇴한 켄신은 군대를 나나오 성으로 물렸다고도 하고, 그대로 테도리 강을 건너 다이쇼지大聖寺 근처까지 진격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을 끼고 있는 지형에 익숙하지 않는 켄신이 물이 불어나 있는 테도리 강을 건너 대추격전을 실시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켄신은 전투가 벌어진지 3일 후인 26일에 나나오 성으로 돌아가, 쿠와타테(鍬立, 성을 공략한 후에 옛 성을 파괴하고, 새로 축성을 시작하는 시공의식)를 위해 처음으로 등성하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다 군을 테도리 강으로 밀어버린 후, 즉시 나나오 성으로 군을 물린 것이라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나나오 함락에서부터 테도리 강 전투, 그리고 나나오 등성에 이르는 모습은, 당시 우마야바시 성厩橋城에 있던 기타죠 타카히로北条高廣 / 카게히로景廣 부자에게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켄신다운 장문의 글에 면밀한 묘사가 이루어진 편지이다. 사실, 테도리 강 전투의 모습이 기록된 양질의 사료는 이 편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의 양상도 이 편지를 통해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신초코우키信長公記》에서는【 호쿠리쿠 카가로 출진한 병력은 그 지역의 작물을 수확하고, 미유키츠카(御幸塚, 코마쓰)에 토목공사를 한 후, 사쿠라 모리마사佐久間盛政를 남겨놓았다. 다이쇼지 성에도 토목공사를 하고 시바타 카츠이에의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고 간결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도 역시 오타 규이치의 기록으로선 희소하다. 이와 같이 간략히 기록된 싸움이 하나 더 있는데, 오다 / 도쿠가와德川 연합군이 다케다 군武田軍에게 패한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合戰이다. 규이치는 켄신과 신겐에게 패한 2번의 전투를 기록에 남기기 싫어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테도리 강 전투의 실상은 지금까지 기록한 대로라,《신초코우키》에 기록된 바와 같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反 오다 동맹의 일각으로서 켄신이 오다 군에게 압승했기에 反 오다 동맹의 전의가 크게 상승한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에 모반을 일으킨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군에게 공격을 받고 멸망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다음해인 텐쇼 6년(1578) 봄에는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오다 군을 배신하였고, 이에 호응한 모리 테루모토가 하리마 원정을 실시했다. 그 모두가 켄신이 오다 군을 격파하고 드디어 입경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안타깝지만 텐쇼 5년(1577)에 켄신이 입경하는 일은 없었다. 테도리 강 전투를 끝내고 나나오 성으로 돌아온 켄신은 여러 지방의 전후처리를 마치고 에치고越後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으로 돌아갔다. 12월 18일의 일이었다. 우에스기 군의 태반은 작년의 나나오 성 포위 이후, 사실상 1년간 이 땅을 떠나있었다. 그 소모는 상당한 것이었으리라. 일단 에치고로 돌아가 원기를 회복한 뒤, 다음해 봄이 되면 출진하겠다고 켄신이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음의 목표는 간토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켄신은 사실 입경전을 실시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도 부정할 순 없다. 12월 23일, 켄신은 막하의 무장 80여 명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이는 다음 출진에서의 동원명부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에는 지금까지의 에치고 제장들에, 엣츄의 진보神保, 노토의 유사遊佐 / 누쿠이溫井, 잇코종一向宗의 즈이센사 / 쇼코우사와 같은 신참들이 이름이 많이 보인다. 맨 앞에 이름을 올린 건 우마야바시의 기타죠 부자였으나, 호쿠리쿠 무장들의 이름도 비교적 많다. 이를 보면, 거듭된 호쿠리쿠 진격을 의도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다 켄신은 출진을 텐쇼 6년(1578) 3월 15일로 정하고, 제장들에게 집결을 명했다. 이 출진날은,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가 미키 성에서 반기를 든 때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텐쇼 5년(1577) 봄, 사이가 정벌에 나선 노부나가의 빈틈을 노려 동서에서 협공하자는, 모리 테루모토가 켄신에게 보낸 편지도 남아있다. 反 오다 동맹은 이를 다음 해 봄에 실시하기로 정한 게 아니었을까. 위와 같은 상황에서 켄신은 동서에서 노부나가를 공격할 계획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만년의 켄신은 전술 뿐만 아니라, 영지 통치나 가신단 지배와 같은 정략적인 면에서도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다케다 신겐이 죽은 후에는 간토 간레이關東管領라는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기타죠 부자에게 보낸 간토 출진을 표명한 편지도, 실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 뿐, 속단은 할 수 없다. 출진할 시기가 되어서 진격목표를 호쿠리쿠로 바꾸는 정도의 모략을 벌였을 확률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반복해 말하자면, 테도리 강의 전투는 전국사상의 전기가 된 전투 중 하나이다. 전략전술 양면으로 대성한 켄신을 주축으로 삼은 反 오다동맹의 공동작전이 실행에 옮겨졌다면, 노부나가의 운명도 어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에치고의 눈이 녹고, 여러 지방의 군세들이 거의 집결한 텐쇼 6년 3월 9일, 켄신은 화장실에서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어,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3월 13일의 일이다. 사인은 뇌일혈로 일컬어진다. 기묘하게도 신겐이 노부나가를 토벌하려고 한 직전에 죽은 것처럼, 켄신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치 신이 신겐 / 켄신이 아닌 노부나가를 역사의 추진자로 선택한 듯 말이다.

 

덧글

  • 도연초 2014/05/06 22:04 # 답글

    켄신이 좀더 살았다면 모리(산요 산인지역의 아카마쓰 계통 포함), 쵸소카베, 호죠가와 연합하여 제 2차 노부나가 포위망을 친다는 케이스를 생각해 볼수 있겠군요;
  • 3인칭관찰자 2014/05/07 16:17 #

    켄신이 살아있었다면 최소한 카가 / 노토 / 엣츄가 3년(1578~1581) 만에 노부나가 땅이 되어버리고 에치고가 세 방향에서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위의 영주들(모리 / 조소카베 등)과 연합한다면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도 많이 늦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단지 이 글 저자분과는 생각이 다른 게, 1570~73년의 1차 노부나가 포위망과는 달리 이 시점에선 이미 노부나가가 일본의 정치 / 경제 중심지인 혼슈 중부지방을 거의 장악한 상태라서... 포위망이 정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는 한 노부나가를 멸망시키거나 쓰러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 아니었을까.. 하네요.(추측의 영역이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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