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테도리 강手取川 전투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9호(2001년 10월호) 50~65쪽의 기사인《우에스기 켄신 - 천하로의 대망》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년도는 1577년)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과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이끄는 오다 군이 카가에서 충돌한《테도리 강 전투》를 중심으로 다룬 기사로 저자는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씨입니다.(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전투》- 우에스기와 오다, 첫 대결


  처음으로 모략을 사용한 켄신

  나나오 성七尾城 남쪽 세키도 산성石動山城에 진을 치고, 여기를 본진으로 삼아 나나오 성을 계속 포위하고 있던 켄신에게, 오다 군의 원군이 카가加賀로 난입했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은 (1577년) 8월 9일이었다. 원군이 오기 전에 나나오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켄신은 즉각 카가 잇코잇키의 수령인 시치리 요리치카七里賴周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나나오 성의 공략을 서둘렀다. 이대로는 오다 군이 카가를 석권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다 쪽에선 카가가 방어상의 요충이 될 수 있는데 비해, 우에스기 쪽에서 카가는 입경을 위한 공세 발기점으로서 중요했다. 카가 (잇코잇키) 신도들은 동원능력이 컸으며, 입경작전의 책원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카나자와金澤라는 도시도 있었다.

  거기에다, 오다 군에게 카가가 제압당하게 된다면 교토로의 진격이 어려워진다. 주된 이유는 앞에 써놓았지만, 테도리 강 유역은 복잡한 하천지형이었다. 수성水城으로 유명한 간토의 오시 성忍城이나 우스이 성臼井城 공략에 실패했던 것처럼 켄신은 통상적으로 공격해서는 효과가 없는, 물을 끼고 있는 지형에는 서툴렀던 듯 하다. 테도리 강 남쪽의 미유키츠카御幸塚, 훗날 코마쓰 성小松城이라고 불리게 된 그 주변은 전형적인 수성 지형이었으므로, 켄신으로서는 오다 군이 이곳의 방비를 굳혀놓기 전에 카가로 진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나오 성내에서는 공성전 도중에 번진 전염병으로 성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갔다. 이로 인해 슌오마루春王丸도 고작 5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하타케야마 종가가 단절되고, 시체냄새가 진동하는 성내에서는 염전기운이 만연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오 성은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맞서 켄신은, 처음으로 모략을 시도했다. "하타케야마 씨의 옛 영지와 나나오 성을 주겠다." 는 내용으로 유사遊佐 / 누쿠이溫井 일족에게 내통을 권유한 것이다. 이익을 미끼로 내통을 요구하는 건, 의義를 중시하고 청렴결백을 내세워 온 지금까지의 켄신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켄신이 센고쿠 영주로서 성장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는 기분이 든다. 썩 내키진 않았으나, 오다 군이 코앞까지 쳐들어온 지금에 와서, 이제 모략을 쓰는 걸 주저할 이유는 없다는 게 켄신의 거짓없는 심경이었으리라.

  유사 / 누쿠이 일족이 켄신에게 내통을 약속한 편지를 보낸 것은 9월 13일이라고 한다. 그날 밤은 보름달이 뜬 추석이었다. 풍류를 즐기는 켄신은 성의 함락을 앞두고, 달놀이 연회를 열었다. 연회가 절정에 이를 무렵에, 케신은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를 읊었다고 한다.


서리는 군영에 차고, 가을 기운 청량하다.
기러기는 줄을 지어 날아가고
달은 오밤중 하늘에 맑게 걸렸다.

에치고를 넘어 노토의 풍경까지 눈 앞.
고향의 가족은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이로부터 이틀이 지난 9월 15일 새벽, 유사 쓰구미쓰遊佐續光와 누쿠이 카게타카溫井景隆가 내통을 결행했다. 그들은 키오토시 문으로 우에스기 군을 성내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오다 편에 선 쵸 쓰나쓰라長綱連와 그 일가친척 100여 명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처치했다. 이렇게 되어, 그렇게나 버텨온 나나오 성도 드디어 함락된 것이다.

 
  지체되었던 오다 군의 진격

  카가에 난입한 이후의 오다 군의 움직임은 명확하지 않다.《신초코우키信長公記》에는【 소에가와 강 / 테도리 강을 건너, 코마쓰 촌 / 모토오리 촌 / 아타카 / 토가시 등 여러 곳에 불을 지르고 진을 구축했다. 】고 되어 있다. 대다수의 경우, 규이치(오타 규이치,《신초코우키信長公記》의 저자)의 기록은 진격로의 순서대로 지명을 열거하고 있으나, 이 부분은 드물게 그 요지를 잡을 수 없다. 기술한 대로 지도를 되짚으면 알게 되는데, 나나오 성을 향하여 북상했어야 할 오다 군이 남하하였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 소에가와 】가 어딘지는 불명이나, 테도리 강의 별명인【 미나토 강 】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도 한다. 학의學義에 따르면 테도리 강의 지류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코마쓰 촌 】과【 모토오리 촌 】은 테도리 강 남쪽에 있는 현재의 코마쓰 시小松市 시내, 그리고【 아타카 】는 코마쓰 시내의 아타케세키安宅關를 가리킨다.   

  문제가 되는 건,【 토가시富樫 】란 지명으로, 이 곳이 과거 카가 슈고守護로 있던 토가시 씨富樫氏의 남쪽 / 북쪽 거점 어딘가를 가리킨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북쪽이라고 한다면 테도리 강 북쪽으로, 우에스기 쪽의 거점 마쓰도 성松任城에서 동쪽에 위치한 현재의 카나자와 시 타카오高尾가 되는데 이는 말할 바 없는 요령부득이다. 그러나 남쪽이라면 토가시 장富樫庄이 있던 카가 시 타카오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다 군의 남하 루트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필자는 이것이 테도리 강 전투 후 오다 군이 퇴각한 루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이 출진에 오타 규이치는 동행하지 않았고, 그 서술은 사람들에게 들은 것을 적은 것이리라. 퇴각로를 잘못 듣고 진격로처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부분의 기술도 이해할 수 있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이렇게 되면 오다 군의 진격로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노부나가의 측근인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에게 보낸 9월 13일자 연서장連書狀에 따르면【 고지대의 길에는 잇코잇키의 거점이 많아 진격이 곤란하므로 일부러 강가를 따라 진격하고 있다. 】고 한다. 오다 군이 테도리 강을 건넌 것은, 9월 10일 무렵이었다. 에치젠 키타노쇼北の庄에서 50km 정도밖에 진군하지 않았음에도, 거의 1개월 이상을 소비했다. 오다 군의 진격치고는 유례없을 정도로 늦다.

  연서장이 말하듯이, 잇키 세력의 저항이 격렬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이 시기는 가을로. 장마가 내리는 계절이었다. 강물이 불어나거나 범람하였기에 진격이 크게 늦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일 정도면 진격할 수 있는 거리를 걷는 데 이만한 일수가 걸린 건, 나나오 성을 구원하는 군대로서는 지나치게 늦다. 거기에다 테도리 강을 건넌 시바타 가쓰이에는 미즈시마水島에 포진한 채로 거의 반 달 가까이 체진하였다. 이러한 장기체진의 이유도 역시 수수께끼이다.

  완만한 진군과 장기체진의 이유를 작전상으로 생각해 보자면, 노부나가가 호쿠리쿠로 출진할 계획이었을 경우, 노부나가의 본군이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점점히 늘어선 잇키 세력의 거점을 소탕하면서 진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본군이 도착할 때까지 가쓰이에들이 테도리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리라.

  9월 10일자의 연서장에는,【 명령이 내려지는 즉시 진격할 예정이다. 그리고 원군은 필요없다 】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은 노부나가가 모반을 일으킨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를 설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다 군이 장기체진한 것은 노부나가의 출진 취소가 호쿠리쿠를 진격하는 오다 군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가미카타(上方, 교토 인근지역)에서 결판이 날 때까지 진격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긴박한 가미카타의 정세를 우려한 편지였다는 상상도 든다. 

  그러나 이 오다 군의 느릿느릿한 행동을 답답하게 생각하였던 게 동행하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히데요시로서는 카츠이에의 공적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호쿠리쿠에서의 처치를 신속히 끝내고 자신이 뒷공작을 하고 있는 하리마播磨로 진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때에 들어온 것이 히사히데의 모반 소식이었다.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에게 테도리 강 남쪽 강변에서 진군을 멈출 것을 진언했으나, 카츠이에는 이를 무시했다. 이것이 작전상의 대립을 일으켜 히데요시가 멋대로 귀진하는 중대한 군율위반을 범하게 된 것이다.【 하시바 치쿠젠(히데요시), 허가 없이 진을 물리고 철수해 버린 것에 대해 (노부나가가) 괘씸한 짓이라고 화를 내셨기에 그 입장이 곤란해졌다. 】고《신쵸코우키》에 기록되어 있듯,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히데요시에게 근신을 명령했다.

  어느 쪽이든, 이 진격중지로 켄신은 구원받았다. 오다 군은 테도리 강을 넘기는 했지만, 중요한 책원지인 카나자와까지 손에 넣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덧글

  • 도연초 2014/05/06 15:15 # 답글

    카가 지역이 재미있는점이, 일향종 폭도들이 한세기 정도 지배했다는 사실....(토가시 가에서 일단 형식상 다이묘를 뽑았지만 사실상 바지사장이었던 걸로)
  • 3인칭관찰자 2014/05/06 17:41 #

    시바 료타로 씨가 자기 소설에서 그걸 "변태적인 체제" 라고 부른 기억이 나는군요. 오닌의 난 이후 여러 유력 가문의 내분에서 어부지리를 챙겨 득세한 하극상 세력이 많았지만 잇코종이 뒤엎은 카가 쪽은 좀 특이한 곳이라는 느낌이..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3858
460
346290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