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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테도리 강手取川 전투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9호(2001년 10월호) 50~65쪽의 기사인《우에스기 켄신 - 천하로의 대망》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년도는 1577년)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과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이끄는 오다 군이 카가에서 충돌한《테도리 강 전투》를 중심으로 다룬 기사로 저자는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씨입니다.(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호쿠리쿠로의 전진轉進》- 입경으로의 전략전환


  켄신과 노부나가의 동맹결렬

  텐쇼 원년(1573),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원정 도중에 죽고, 그 군대가 가이甲斐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일단 동쪽의 위협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노부나가는, 신겐이 죽은 줄 모르고 마키시마 성에서 병사를 일으킨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공격하여 그를 교토에서 추방했다. 이어서, 오다니 성小谷城 주변까지 밀려 있던 아자이 / 아사쿠라 군을 철저한 추격전으로 멸망시키고, 에치젠과 오미近江 북부를 손에 넣었다.

  텐쇼 2년(1574)에 노부나가는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잇키를 토멸하여 영내인 노우비(濃尾, 미노와 오와리)를 안정시켰으나, 아사쿠라 잔당과 잇코종 신도들에 의한 대규모 잇키一揆가 발생한 에치젠을 상실하고 말았다.

  텐쇼 3년(1575), 노부나가는 최대의 강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를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동쪽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일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을에는 에치젠越前으로 군을 몰아 잇키를 진압, 그 영지경영을 슈쿠로宿老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맡기고 그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공격하는 시바타", "귀신 시바타"와 같이 형용되는 가쓰이에이기에, 상당히 호담한 무장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 실상은 조그만 일에도 조심하는 질실강건한 무장이었다. 물론, 그가 호담한 무장이라는 이미지는 민중들에게도 알려져 있었기에, 그 무위를 가지고 잇키로 황폐해진 에치젠을 재건하는 데는 적임이었다.

  노부나가가 그러했듯이, 켄신을 둘러싼 상황도 마찬가지로 신겐의 죽음으로 일변하였다. 간토 간레이關東管領로서 간토 평정을 주된 전략목표로 삼고 있던 켄신의 눈이 호쿠리쿠北陸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켄신은 돌연히 현실적인 전략방침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 변심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간토 정벌의 대의명분이기도 했던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와 다케다 신겐이라는 두 사람의 강적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 이유인지도 모른다.

  간토 간레이는 원래 신겐을 토벌하기 위한 명목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간토 간레이 직위에 취임하자 이번에는 그 직무를 다하기 위해 간토로의 출진을 밥먹듯 반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신겐의 존재가 사라졌기에 켄신은 간토 간레이의 주박에서 풀려났다고 볼 수도 있다.

  고생은 많고 이득은 적은 간토 원정에 비하여, 본거지인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에서도 가깝고 아버지 / 할아버지 대 이래의 공략목표였던 엣츄越中에 진출하는 전략이 현실적이었다. 켄신에 있어서는 마지막 간토 출진이 된 텐쇼 2년(1574) 두 번에 걸쳐 에치고를 넘어 간토로 향한 것은, 호쿠리쿠 방면으로의 진출에 전념하기 위한 지반 굳히기였다. 우마야바시 성厩橋城을 중심으로 한 고즈케上野 영지의 통치를 기타죠 타카히로北条高廣 / 카게히로景廣 부자에게 맡긴 켄신은 이후, 호쿠리쿠의 잇코잇키를 토벌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신겐의 죽음으로 커다란 방패를 상실한 호쿠리쿠의 잇코잇키는 켄신이 엣츄를 제압하고, 노부나가가 에치젠을 제압함으로써 고립되어, 이대로는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정세였다. 텐쇼 3년(1575) 6월, 이시야마 혼간사
石山本願寺가 켄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우연히도 노부나가가 나가시노에서의 대승을 알려온 편지와 같은 6월 13일자로 보낸 편지였다. 9월에는 에치젠 잇키의 잔당이 엣츄 도야마富山의 성장城將 카와다 나가치카河田長親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켄신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텐쇼 4년(1576)에 접어들어서였다. 2월, 켄신은 드디어 노부나가와 단교하고, 5월에 아버지 / 할아버지 이래의 숙적이었던 잇코잇키와 화해했다.

  이 역사적 결단에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암약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요시아키는 텐쇼 원년(1573)에 교토에서 추방당해, 주코쿠中國의 모리 가문毛利家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으나, 막부 재건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타고난 자산인 정치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노부나가 토벌의 고나이쇼(御內書, 쇼군이 발행하는 공적 문서)를 전국 각지로 뿌리며
오다 동맹의 재결집을 획책하고 있었다.

  요시아키의 격문에 의해 주코쿠의 모리 테루모토 / 키나이의 이시야마 혼간사 / 카가의 잇코잇키에다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이 가담하여, 다시 反 오다 동맹이 결성되었다. 두 차례의 입경을 이루었던 켄신에게 있어서, 막부 재건의 일익을 담당하는 건 바라는 바였음이 틀림없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킨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까지 가담하게 된 이 反 오다 동맹은 참가한 군세와 규모를 단순히 비교하면, 다케다 신겐을 중심으로 했던 겐키 3년(1572)의 그것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반 오다 동맹에 가입함으로써, 지금까지 잇코잇키의 토벌을 목적으로 한 켄신의 호쿠리쿠 전략은 크게 전환점을 맞게 된다. 요시아키의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카가 막부 재건을 위해 입경을 이룬다 - 즉 교토로의 진군이라는 커다란 전략목표가 설정되었다. 이 때 켄신의 입경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에치젠에서 카가로의 진출을 엿보고 있던 시바타 카츠이에, 그리고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에 농성해 있던 하타케야마 가문이었다.


  나나오 성 공략에 애먹는 켄신

  노토 반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나나오 성은, 카가 / 노토 / 엣츄의 연락선을 제압하는 요충지였다. 해발 300m의 산등성이에 혼마루本丸를 두고, 7군데의 능선에 구루와曲輪를 쌓고서는 요지를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돌담으로 둘러쌓은 홋코쿠北國 제일의 견성堅城이었다. 북쪽으로는 나나오 만을 바라볼 수 있으며, 성곽으로 둘러쌓인 성하촌이 형성되었고, 동쪽으로는 키오토시 강木落川, 서쪽에서 남쪽에 걸쳐 오타니 강大谷川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켄신도 이 성을 공략하는 데 애먹었기에, 공성전은 2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켄신이 최초로 나나오 성을 공격한 것은 텐쇼 4년(1576) 9월의 일이었다. 노토 슈고守護인 하타케야마 가문은, 텐쇼 2년(1574)에 당주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그 신하에게 모살당하고, 그 아들인 슌오마루春王丸가 후계자로 옹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슌오마루는 이 때 고작 2살의 나이. 실질적인 성주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켄신은, 하타케야마 가문에서 양아들로 맞아들인 죠죠 마사시게上
条政繁를 하타케야마 가문에 돌려보낸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노토로 침공하였다.

  그러나 하타케야마 세력은 켄신의 개입을 싫어하여 그와 대결할 자세를 보였다. 노토의 여러 성을 공략한 우에스기 군은 나나오 성을 포위했으나 요새의 견고함을 자랑하는 이 성을 함락시키는 건 용이하지 않았다. 켄신은 눈 내리는 계절을 거쳐, 텐쇼 5년(1577)의 새해를 맞고서도 포위를 풀지 않았으나 3월에 이르러 일단 에치고로 돌아가 영내의 처치를 끝낸 후에, 윤 7월에 다시 출진했다.

  성내의 실권을 잡고 있던 건, 하타케야마 가문의 중신들이었다. 그들은 오랜 농성에 지쳐서, 우에스기 가문에 붙을
것인지 오다 가문에 붙을 것인지를 놓고 분열해 있었다. 유사 쓰구미쓰遊佐續光와 누쿠이 카게타카溫井景隆를 중심으로 한 일파는 호쿠리쿠를 병탄해 가는 켄신에게 붙자고 주장했다. 또 다른 파인 쵸 쓰나쓰라長綱連 일파는 해가 떠오르듯 기세를 더해가는 노부나가에게 붙자고 주장하였다.

  2번째의 켄신 출진에 맞서, 오다 파의 쵸 쓰나쓰라는 스님이 되었던 동생 쵸 쓰라타쓰長連龍를 사신으로 보내어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나나오 성의 구원요청을 승낙하여, 8월 8일, 시바타 카츠이에를 총대장으로 한 오다 군은 에치젠을 출발, 카가로 난입했다.

【 8월 8일, 시바타 슈리노스케를 대장으로 홋코쿠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타키가와 사콘 /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 코레즈미 고로자에몬 / 사이토 신고 / 우지이에 사쿄노스케 / 이가 이가노카미 / 이나바 이요 / 후와 카와치노카미 / 마에다 마타자에몬 / 삿사 쿠라노스케 / 하라 히코지로 / 카나모리 이로하 / 와카사 부대가 카가로 난입했다. 】

  오타 규이치太田牛一의《신초코우키信長公記》에 기록된 호쿠리쿠 원정의 면면들이다. 대장은 시바타 카츠이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 코레즈미(니와) 나가히데維住長秀 / 사이토 신고로齋藤新五郞 / 우지이에 나오미치氏家直通 / 이가 사다하루伊賀定治 / 이나바 잇테츠稻葉一鐵 / 후와 미쓰하루不破光治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 하라 나가요리原長賴 /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杉長近 등의 제장들에 무토 슌슈武藤舜秀의 와카사 부대가 가담해 있었다. 그 총병력은 약 3만 명으로, 노부나가 자신도 1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오다 군 주력의 출진이었다. 노부나가는 어째서 호쿠리쿠 정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 카가의 잇코잇키는 우에스기와 오다 사이에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켄신과 잇코잇키가 동맹을 맺음으로서 카가가 우에스기의 쪽으로 돌아섰기에, 켄신의 세력권이 일거에 에치젠 접경지대까지 뻗어왔다. 아사쿠라 시대부터 여러 번 잇코잇키가 일어나 커다란 정정불안을 야기했던 에치젠이다. 텐쇼 3년(1575)에 오다 군이 에치젠 잇키를 평정했을 때, 잇키의 잔당은 켄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바 있다. 입경을 표명한 우에스기 군이 에치젠에 들어서면 켄신에게 호응한 잇키가 다시 발발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키나이에서는 이시야마 혼간사를 그 사역 내로 몰아넣었지만, 잇코종 신도들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후원을 받아 아직도 완강히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시야마 혼간사를 공략하지 않는 한, 키나이의 안정은 바랄 수 없었음에도 이를 조기에 공략하는 건 무리였다. 노부나가는 장기포위전으로 돌아서서 혼간사를 엄중한 포위망에 두는 한편으로, 텐쇼 5년(1577) 2월에는 혼간사를 지원하던 기이紀伊의 사이가雜賀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러한 처치로 인해, 적어도 혼간사가 적극적인 공세에 나설 가능성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사이고쿠西國에서는 혼간사 세력을 후원하는 모리 가문이 하리마播磨의 여러 호족들에게 뒷공작을 하고 있었으나, 즉각 출진할 낌새는 없었다. 오다 군도 하시바 히데요시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하리마 세력에게 공작을 하고 있었으며, 하리마의 최대세력인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는 이 당시 사이가 공략에 참가하는 등 자주적으로 노부나가에게 가담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하리마의 정세는 오다 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모리 군에 대한 완충지대로 유효하게 기능했다.

  이렇게 보면, 노부나가의 영역 중에서 가장 긴박했던 게 호쿠리쿠 쪽이었다. 긴박하기로 따지자면 호쿠리쿠 다음이 하리마, 그 다음이 키나이 순서가 되지 않을까. 호쿠리쿠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부나가는 켄신보다 먼저 카가를 점령할 필요에 내쫓겼다. 잇키 세력뿐이라면 비교적 용이하게 제압할 수 있을 카가도, 강적인 우에스기 씨가 진출한다면 그 평정이 곤란해질 것이다. 켄신은 나나오 성 공략에 발이 묶여 있었다. 그 동안 카가를 제압하고, 나나오 성의 구원에 성공한다면 오히려 우에스기 와의 접경은 일거에 엣츄까지 밀어붙일 수 있으리라.

  여기서 카가 중부의 지형에 주목하길 바란다. 카가 중부를 흐르는 테도리 강手取川은 하쿠산白山에서 수원이 시작되어, 현재의 미카와쵸美川町에서 동해(원문은 일본해)로 흘러가는, 길이 약 70km의 하천이다. 지금은 완만히 흐르는 테도리 강도, 당시는 수시로 범람하는 거친 강이었다. 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으며, 범람 때마다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무수히 많은 갯벌과 연못이 만들어졌다. 현재의 카와키타쵸川北町, 마쓰도쵸松任町, 미카와쵸 근처에서 "시마島" 의 이름이 붙은 마을 이름이 무수히 확인되는 것은, 테도리 강의 범람으로 인해 촌락이 섬과 같이 붕 떠올라 보이는 현상에서 이름붙여진 것이라 한다.

  테도리 강의 남쪽에 위치한 코마쓰小松 부근도 역시 강줄기가 일정하지 않아, 수렁논과 갯벌이 도처에 깔려있는 지형이었다. 한번 비가 내리면 길이 차단되어, 군대가 진격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역으로 방어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저해지형의 연속으로, 지키기 쉬운 토지가 되겠다. 노부나가의 조총 요격전술은 완성의 영역에 달해 있었기에 단구형 지형의 강가에 마방책 진지를 설치한다면 나가시노 전투를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그 정도로 결정적인 상황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여도, 켄신의 진격을 막아내기에는 적당한 지형이었다.

  다케다 신겐이 죽은 후, 노부나가가 가장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던 건 전국 최강이라는 평판이 도는 켄신이었다. 지금까지 켄신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던 노부나가도, 한편으로 텐쇼 3년(1575) 나가시노 전투에서 정예한 다케다 군을 완벽하게 격파하였기에 전술적으로도 자신감이 생겼음이 틀림없다. 그 자신감이 켄신에 대한 적극적인 작전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이렇게 노부나가는 스스로 호쿠리쿠로 출진할 것을 결의했다.

  노부나가는 진격에 앞서서, 에치고 북부를 영유하는 우에스기 씨의 무장으로, 재삼 모반한 전과가 있는 혼죠 시게나가本庄繁長를 끌어들여 배후에서 켄신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배반과 복속을 반복한 혼죠가 이 호기에는 낚이지 않았다. 가신의 주권을 인정한 켄신의 인정仁政을 앞세운 가시단 장악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대조적인 사건이 키나이에서 갑자기 발생했다. 노부나가 막하의 무장,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모반이다. 이시야마 혼간사의 포위진에 가담해 있던 마쓰나가 히사히데 / 히사미치久通 부자가 8월 17일, 멋대로 진지를 치워버리고 야마토大和의 시기 산성信貴山城에 농성한 것이다. 이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고나이쇼에 내응한 모반이라고 일컬어지나, 오다 군의 호쿠리쿠 출진 직후를 노린 절묘한 타이밍에 벌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이 키나이에서 어떻게 번져나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노부나가에 있어선, 호쿠리쿠의 정세보다 히사히데의 모반을 진압하는 쪽이 급선무였다. 히사히데의 설득을 단념한 노부나가는 그를 토벌하기로 마음먹고, 호쿠리쿠의 정세는 가쓰이에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덧글

  • windxellos 2014/05/05 13:12 # 답글

    그러고 보니 테도리가와 이후 켄신이 병사하지 않았을 것을 가정하고 켄신 진영과 노부나가 진영이 싸우는 보드게임이 일본에 있었지요. 세력상으로는 포위망인데 모리는 소극적이고 다케다는 병력이 적고 켄신 부하들은 지휘력이 딸리고 해서 사실상 켄신 진영의 주력은 게임 내 전투력 최강인 켄신 직속군 정도. 오다는 어마어마한 병력과 회복력이란 설정이더군요. 대략 양측의 특징을 잘 반영한 것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4/05/05 16:59 #

    그런 보드게임도 있었군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모리, 나가시노의 패배에서 회복 못한 다케다, 방면군이 없이 켄신의 지휘력에 기댔던 우에스기, 중부 일본의 인구와 인프라를 먹어 덩치가 산만해진 오다... 말씀대로 당시의 정황을 잘 반영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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