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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테도리 강手取川 전투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9호(2001년 10월호) 50~65쪽의 기사인《우에스기 켄신 - 천하로의 대망》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년도는 1577년)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과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이끄는 오다 군이 카가에서 충돌한《테도리 강 전투》를 중심으로 다룬 기사로 저자는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씨입니다. 작가분이 이 글을 쓰실 무렵에 우에스기 켄신을 주인공으로 한 가공전기(IF 역사물)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켄신에게 유리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쓰여져 있을지도 모릅니다.(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동분서주》- 숙적 신겐信玄과의 싸움


  천하무쌍의 전술가, 우에스기 켄신

  "에치고의 용"이라고 일컬어지는 우에스기 켄신은 어쨌든 전투에 강했다. 매년과 같이 싸움을 계속하면서 단 한번도 누가 봐도 패배로 기록될 만한 결과를 낸 적이 없다. 그러나 의외로 켄신의 생애에서 야전이 벌어진 사례는 드물다. 많은 적이 성곽에 농성하며 켄신과의 야전을 피했기 때문에 싸움은 필연적으로 공성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 정도로 당시에도 "켄신은 싸움에 강하다"는 평판이 높았던 것이다.

  켄신의 전술적 평가를 결정지은 것은 수차에 거친 신슈(信州,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 그리고 에이로쿠(1558~1569) 시기의 간토에서의 전투였다. 켄신은 이들 싸움에서 가이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사가미相模의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라는, 동일본東國을 대표한 두 사람의 센코쿠 영주를 동시에 적으로 돌리면서도 한번도 승부에 밀린 적이 없었다.

  전략으로 보자면 압도적으로 켄신의 능력을 상회하며, 전투에도 강했던 신겐과 우지야스였으나 두 사람 모두 켄신과의 전투를 피하고, 전술보다는 전략으로 켄신을 타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켄신은 두 사람의 모략에 골치를 앓으면서도 전술만으로 5할 승부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켄신이 출진한 것은 모두 제장들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야말로 깊은 샤려도 없이 즉흥적으로 벌인 일로, 여기에는 켄신의 전략적 의도라는 걸 전혀 읽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켄신이 출진하면 다케다 군도 호죠 군도 썰물이 빠지듯 후퇴하여, 일단 켄신의 예봉을 피한 후 켄신이 사라지면 공격을 개시했다. 켄신의 출진에 의해 신겐의 시나노에서의 전략과 우지야스의 간토關東에 대한 전략 플랜은 큰 차질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은, 뒷공작으로 무장들을 투항시켜 켄신이 출진해 올 명목을 상실시킨 이후였다.

  지금까지의 전사戰史에서, 전술적 불리를 전략으로 커버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전략적 불리를 전술로 커버할 수 있었던 건, 고금동서를 찾아봐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켄신은 드물게 보는 전술가였다.

  텐쇼天正 5년(1577) 9월 23일에 벌어진 테도리 강手取川 전투는 전국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우에스기 켄신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을 공략하기 위해 출진한 켄신에 맞서, 나나오 성에 농성해 있던 하타케야마 가문의 중신 쵸 쓰나쓰라長綱連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이를 수락하여, 슈쿠로宿老 시바타 가쓰이에를 대장으로 하는 약 3만 대군을 호쿠리쿠北陸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원군이 도달하기 전에 켄신이 나나오 성을 공략. 그 기세를 몰아 카가 중부까지 진격하여 테도리 강에 포진해 있던 오다 군을 격파했다는 게 그 줄거리이다.

  테도리 강 전투는 우에스기 군과 오다 군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전투였는데, 켄신과 노부나가의 직접대결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양질의 사료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역사의 앞무대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왜 켄신은 나나오 성을 공격한 것인가. 왜 켄신과 노부나가가 호쿠리쿠에서 격돌하게 되었는가, 왜 테도리 강에서 전투가 일어났는가... 싸움의 실상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테도리 강의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쫓아가 보면, 실은 이 전투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대사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테도리 강 전투가 일어난 요인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진 에이로쿠永綠 초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다.


  신겐과 인연의 싸움을 계속한 켄신

  에치고越後를 통일한 우에스기 켄신은, 카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 신겐과 싸우는 한편으로 호쿠리쿠에서는 잇코잇키一向一揆와 항쟁을 벌였다. 이는 잇키 세력의 총본산인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가 다케다 신겐과 맹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켄신의 선선대인 나가오 요시카게長尾能景 때부터 계속되어 온 뿌리깊은 역사에 따른 것이었다. 나가오 요시카게는 에이쇼永正 3년(1506) 엣츄越中에서 잇키 세력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켄신의 아버지 나가오 타메카게長尾爲景로 타메카게는 에치고에서 잇코종을 신앙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키고 엣츄에서 잇키 세력과 손을 잡은 진보 씨神保氏와의 싸움을 거듭했다. 이 대립구도가 켄신의 대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에이로쿠 3년(1560) 3월, 진보 나가모토神保長職가 잇코잇키와 연합하여 시이나 야스타네推名康胤의 마쓰쿠라 성松倉城을 공격한 것이 켄신 시대 엣츄 소란의 시작이었다. 이후, 엣츄는 진보 나가모토와 시이나 야스타네의 2대 세력으로 갈라져, 켄신에게 복속과 배반을 반복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 쪽이 켄신에게 대적하면 다른 한 쪽은 켄신에게 붙고, 켄신에게 붙었던 자가 켄신이 떠나고 나면 또 배반하는 식으로, 전란이 잦아들 날이 없었다. 그 배후에서 두 사람을 움직인 것이 다름 아닌 다케다 신겐, 그 사람이었다.

  켄신과 신겐이 처음으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전을 벌인 것은 텐분天文 22년(1553)의 일이다. 신겐에게 영지를 빼앗긴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갑자기 나타난 켄신 군에게 카와나카지마에 진출해 있던 다케다 군은 참담히 격파당했다. 켄신의 일방적 승리라고 보면 된다. 켄신은 다케다 세력과의 조우전에서 신겐에게 그 정예함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추격전에서는 카와나카지마에서 더욱 더 남하하여 사카키 난죠坂城南条까지 진출하는 높은 기동력을 보여주었다. 그 직후, 켄신은 최초의 교토 입경을 이루어, 신겐 토벌의 칙명을 받았다.

  켄신이 쉽지 않은 적이라는 걸 간파한 신겐은, 우에스기 가신에 대한 뒷공작, 화의를 일방적으로 깨뜨린 기습, 주변 세력들과의 동맹, 카와나카지마에 한정하지 않는 폭넓은 전략 등의 책략을 구사하여 켄신을 농락했다. 그 동안, 켄신과 신겐은 텐분 24년(1555), 고지弘治 3년(1557)에도 카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였다.

  카와나카지마를 세력하에 둬 가는 중이었던 신겐을 토벌할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 켄신은 에이로쿠 2년(1559)에 두 번째로 입경했다. 그리고 무로마치室町 막부 제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배알, 간토 간레이關東管領 취임의 내락을 얻었다. 간토 간레이란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를 보좌하여 후와노세키不破關 동쪽을 통괄하는 무로마치 막부의 직위로, 전국시대에는 유명무실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서는 에치고를 넘어 조슈(上州, 고즈케上野) 우마야바시 성厩橋城에 도착하자 간토 제장들이 이끄는 11만 대군이 그 밑에 모였다고 한다. 유명무실하다고 하는 간토 간레이였으나, 켄신의 무명武名이 그 위광을 부활시킨 것이다.

  켄신은 이 대군을 가지고 난공불락이라고 일컬어지던 오다와라 성의 호죠 우지야스를 공격했다. 1개월의 공성전을 벌였음에도 결국 함락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오다와라를 떠난 켄신은, 가마쿠라의 츠루가오카 하치만 궁鶴岡八幡宮에서 간토 간레이 취임식을 열고, 정식으로 간토 간레이가 되었다. 정식으로 신겐 토멸의 명분을 얻은 켄신은 용약하여 카와나카지마로 뛰어들어, 신겐과의 결전을 도모했다. 에이로쿠 4년(1561) 9월의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결전을 지향하여 출진한 켄신은 선수를 쳐 사이죠 산妻女山에 포진하여 신겐의 의표를 찔렀다. 품 속으로 뛰어든 켄신의 의도를 읽기 힘들었던 신겐은 처음에는 챠우스 산茶臼山에 포진하였으나 켄신의 틈을 노려 카이즈 성海津城에 들어가, 장기간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이 상황에 먼저 안절부절 못한 것은 신겐이었다.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우에스기 군의 측면 / 배후를 치자는【 딱따구리 전법 】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카이즈 성에서 피어오르는 취사연기를 본 켄신은 다케다 군의 출진을 간파, 선수를 쳐서 사이죠 산을 내려갔다. 치쿠마 강千曲川를 건너 하치만바라八幡原로 나간 켄신은, 다케다 군의 정찰병을 빠짐없이 도륙할 것을 명하여, 적의 정보원을 차단했다. 정찰병에게도 별동대에게도 켄신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하치만바라에 포진한 신겐은 완전히 정보부족에 빠졌다.

  정찰병을 풀어 안개 속을 헤집고 다니던 켄신은 신겐의 본진을 발견, 행군대형 그대로 전군이 돌격할 것을 지시했다. 흔히 말하는【 수레바퀴 회전 전법(차륜진) 】이다. 싸움은 켄신과 신겐의 일기토가 벌어졌다고 전해질 정도로 양 군세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대난전이었다. 별동대가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수적 우위에 선 신겐이 카와나카지마의 확보에 성공하긴 했으나, 동생 노부시게를 잃는 등 대가는 컸다. 이 때의 손해가, 가쓰요리 시대의 다케다 군 약체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이 손해에 질려버린 신겐은 그 후 다시는 켄신과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았다. 신슈에서 간토에 걸쳐 켄신이 없는 곳으로 출진하고, 엣츄로부터의 견제를 획책하며, 문자 그대로 켄신을 동분서주시킨 것이다.


  신겐을 협공하기 위한 우에스기 - 오다 동맹체결

  오와리尾張와 미노美濃를 제압하여 유력한 센코쿠 영주의 반열에 오른 오다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1년(1568)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하여 입경을 이루었다. 요시아키를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에 앉히고, 교토라는 일본 정치경제의 중핵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노부나가는 이후로 그 세력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위기는, 겐키元龜 원년(1570)에서 텐쇼 원년(1573)에 걸친 시기였다. 겐키 원년에 시도한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토벌이, 요시카게와 인연이 깊은 매제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실패한 것이 발단이었다. 키나이機內에서는 미요시 3인중(미요시 나가유키三好長逸 / 미요시 마사야스三好政康 / 이와나리 토모미치岩成友通)과의 전투가 계속되어, 노부나가는 두 방면에서 작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나이의 싸움은 이시야마 혼간사를 중심으로 한 잇코잇키와의 싸움으로까지 확대되어, 이는 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에까지 파급되었다. 쇼군의 권위를 빌려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노부나가였으나, 노부나가의 괴뢰가 되는 걸 싫어한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토벌의 격문을 각 지방에 뿌렸다. 이 격문에 응한 것이, 가이甲斐 / 시나노 / 스루가駿河를 제압하면서 북쪽과 동쪽으로의 세력신장이 한계에 달한 다케다 신겐이었다.

  겐키 3년(1572) 반 오다동맹에 가담한 신겐은 그들의 희망으로 큰 기대를 모으며, 고후甲府의 츠츠지가사키 저택을 출발했다. 노부나가에 맞선 서상작전西上作戰에 돌입한 신겐에게 호응하여, 호쿠리쿠에서는 엣츄의 잇키 세력에다 진보 / 시이나 양 군이 가담하여 우에스기 군을 공격했다. 반 오다 동맹을 획책한 건 요시아키였으나, 여러 세력의 동향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신겐이었다.

  지금까지 신겐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노부나가는, 신겐이 입경의 뜻을 명확히 하자 그와 단교하고, 켄신과의 동맹을 타진해 왔다. 신겐과 잇키 세력이 적이라는 점에서는 노부나가와 켄신의 이해는 완전히 일치했다. 켄신도 즉각 이 맹약에 승낙하여 우에스기 - 오다 동맹이 성립했다. 이 맹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각자가 잇코잇키와 싸우고 있던 장소는 켄신이 엣츄 /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사와 이세 나가시마였으니, 쌍방의 이해가 부딪힐 일은 당면한 바로는 없어보였다. 

  사방을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노부나가는, 기후岐阜를 중심으로 한 내선전략內線戰略으로 적 세력에 대항했다. 내선전략이란 내선의 이利, 즉 영내의 교통선을 살려서 군세를 신속히 이동시켜, 외주外周를 둘러싼 적의 연대를 끊고 각개격파하는 것이다. 이 당시 단순비교할 수 있는 총합병력은 반 오다 동맹군 쪽이 앞섰다. 병력적으로 우세한 적을 내선작전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군대의 기동성과 적의 약점을 꿰뚫는 전술안, 그리고 일관된 전략성이 필요했다.

  노부나가는 신겐과의 직접대결을 피하고, 그 대처를 맹우盟友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맡기는 한편으로, 반 오다 동맹 중에서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되는 아자이 / 아사쿠라 군에게 정치 / 군사 양면으로 대항할 전략방침을 세웠다. 오다 군의 공세에 의해 아자이 / 아사쿠라 군은 오미 북부의 오다니 성小谷城 근처까지 밀려 있었으며, 병력적으로 기대받고 있던 아사쿠라 군이 에치젠으로 돌아간 결과 더 이상 오다 군에 맞설 유효한 존재가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내선전략에 대항하는 형태가 된 것이 외선전략이다. 이는 외주세력이 일치하여 적을 공격함으로써 적 병력을 분산시킨 후 이를 포위ㆍ격멸한다는 점으로, 무엇보다 상호연대가 중요했다. 그러나 반 오다 동맹의 외선전략은,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림으로써 파탄나 버렸다. 신겐은 이를 비난하고, 에치젠 군에 다시 출진할 것을 강경히 요청했으나 요시카게는 눈이 녹는 봄까지 에치젠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일관된 전략성을 가진 노부나가에 비해, 켄신의 행동은 간토, 내지는 엣츄의 무장들에게 구원을 요청받으면 그 땅으로 출진하는 긴급 전개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대단히 즉흥적으로, 간토 평정에 대한 명확한 전략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중소세력의 주권을 중시하는 켄신 특유의 결점이라 하겠다. 신겐에게는 완전히 이 성격을 이용당해 켄신은 간토와 엣츄 사이에서 말 그대로 동분서주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간토 / 엣츄 어느 쪽도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이다.

  켄신과 신겐의 싸움도 마찬가지로 내선전략과 외선전략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을 중심으로 한 켄신의 내선보다는 시나노에서 스스로 싸우고, 간토에서는 호죠 씨와 같이 싸우고, 엣츄에서는 잇코잇키를 선동한 신겐의 외선전략이 우세했다. 켄신에게는 명확한 전략비전이 없었기에, 신겐의 의도대로 춤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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