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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쿠가와 요시노부》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53 徳川慶喜 ~ 菊と葵に揺れた最後の将軍 ~》에 수록된 글【 요시노부를 둘러싼 사람들 남성편 】中 '시부사와 에이이치 - 입신의 은인을 평생 떠받든 일본 실업계의 거인' 을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작가이신 이마이 토시오今井敏夫 님입니다. 서적의 특징상 이 글도 '시부사와와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관계' 가 주로 부각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주셨으면 합니다.


  양이청년에서 요시노부의 가신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청년 시절 과격한 존왕양이주의자尊王攘夷主義者였다.

내년 NHK 대하드라마《창천을 뚫어라》의 주인공이 바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위 인물은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연기하게 될 일본의 탤런트 요시자와 료.


  그는 에도江戸에 유학하던 시기, 미토 존왕양이파 중에서도 과격파로 일컬어지던 후지타 코시로藤田小四郎, 쵸슈長州의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등과 활발히 교류하고 다녔다.

  에이이치는 텐포 11년(1840)에 무사시武蔵 지방 한자와 군榛沢郡 치아라이지마 마을(血洗島村, 지금의 사이타마 현 후카야 시埼玉県深谷市)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농업農業ㆍ양잠養蠶에 염색상藍商과 초물점荒物屋을 겸하는 유복한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에이지로栄二郎' 이다. 아버지 요시마사美雅는 학문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에이지로를 교육시키기 위해 일찍부터 옆 마을의 오다카 아츠타다尾高惇忠 밑으로 그를 통학시켰다.

만년의 오다카 아츠타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尾高惇忠(実業家)')
사촌동생 덕택에 기업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듯.


  이 오다카 아츠타다는 에이지로보다 10살 연상인 사촌형으로, 미토 학 학자水戸学者이기도 하였기에 자연히 에이지로에게 존왕양이론을 주입시키게 되었다.

  기실 에이지로도 17세 때 어용금 조달문제로 진야(陣屋, 관청)의 대관에게 심한 모욕을 받은 걸 계기로 봉건제도에 불만과 반항심이 있었던 만큼 존왕양이운동에 투신할 밑바탕은 깔려 있었다고 해야 하리라.

  분큐 3년(1863) 9월, 에이지로는 친척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渋沢成一郎 / 오다카 아츠타다ㆍ쵸시치로長七郞 형제와 함께 '텐쵸구미天朝組' 를 결성, 타카사키 성高崎城을 점거하고 요코하마横浜에 있는 서양식 저택들을 방화ㆍ토벌할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행 직전 중지되었다.

  텐쵸구미를 해산한 에이지로는, 이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히토츠바시 가문一橋家의 사용인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의 가신家來이라는 직함을 갖고 교토로 올라갔다.

  이것이 연이 되어 에이지로는 히토츠바시 가문을 섬기게 되었다. 이 때 "에이지로는 무사의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는 지적을 받아 '토쿠다유篤太夫' 로 개명하였다.

  히라오카는 요시노부의 책사懐刀라 일컬어질 정도의 수완가였으니, 정치政治라는 것의 현실을 에이지로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이리라. 히라오카는 얼마 후 암살당한다.

  '토쿠다유' 가 된 에이지로는 도보무사御徒士를 거쳐 회계반장勘定組頭으로 중용되면서 총 고쿠다카石高 10만 석인 히토츠바시 가문의 병비개혁兵備改革과 재정개혁財政改革에 재간을 발휘, 요시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2024년부터 사용일본1만 엔권 지폐.(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渋沢栄一')
분명 후쿠자와에 비하면 기업가 위인인 시부사와가 '돈' 과 더 어울리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본가의 장사를 도와 경리經理에 밝았던 그에게, 구래의 관습을 벗어나지 못했던 히토츠바시 가문의 회계를 개혁하는 정도는 손쉬운 것이었으리라.
 
  연공미의 매각법 / 목면 매매 / 초석제조소 건설 등의 업무는 그의 손을 거치며 단시간만에 실효를 거두기에 이르렀다.


  유럽을 목도하다

  케이오 2년(1866) 11월, 요시노부가 쇼군將軍에 취임하면서 시부사와 역시 의도치 않게 막부의 신하幕臣가 되었다.

  그는 고민을 계속했다. 이미 양이사상에서는 탈각한 상태였으나 이대로 막부의 신하로 잔류한다 해도 토쿠가와 막부의 명운은 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토쿠가와 가문을 사직하고 옛날처럼 낭인浪人으로 돌아가기로 막 결심하려던 그 때, 생각지도 않은 행운幸運이 그를 찾아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에 파견되는 토쿠가와 아키타케徳川昭武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선발된 것이다. 시부사와를 선발하고 임명한 건 바로 요시노부였다.

14세 때 촬영한 토쿠가와 아키타케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徳川昭武')
미토 토쿠가와 나리아키의 1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요시노부는 7번째 아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토쿠가와 아키타케는 요시노부의 친동생이자 본가인 미토 가문水戸家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당연히 미토 번 무사水戸藩士들이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쪽 사람들은 외국인을 "이적금수夷狄禽獸" 로밖에 보지 못하는 완미頑迷한 양이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아키타케 옆에 붙여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거기다 박람회가 끝난 후, 아키타케는 그대로 유럽 유학에 임하게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걱정을 계속하던 요시노부는 시부사와를 '속사역俗事役' 으로 수행원 속에 밀어넣었다.

  "속사역이란, 물품관리 / 금전출납 / 문서기록 처리 등을 담당하는 낮은 직책이었다." 고 시부사와는 훗날 술회하였다.

  그래도 시부사와는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앞두고 찾아온 턱없이 좋은 일대의 행운이었던 것이다. 메이지明治ㆍ타이쇼大正 시대 실업가實業家들의 지도자로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수많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정말로 이 때 수행원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유럽 각지의 근대문명近代文明을 접한 점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키타케의 유럽 유학은 토쿠가와 막부가 붕괴한 후에도 계속되었다가 메이지 원년(1868) 5월에 신정부新政府의 귀국명령이 도달하면서 결국 그 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아키타케를 2년 가까이 측근으로 보필하면서 시부사와는 아키타케와 극히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였다.

  귀국 후, 바람 잘 날 없던 미토 번을 상속한 아키타케는 상담역相談役으로 자기를 섬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으나 시부사와는 "깊은 은고를 입은 요시노부 공이 근신하고 계신 슨푸駿府 = 시즈오카静岡에 가서 요시노부 공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려 합니다." 라고 말하며 아키타케의 요청을 거절했다.

  시부사와는 프랑스 체제 중 출납된 온갖 경비를 결산하여, 시즈오카 번의 허가를 받아 그 잔금 중 일부로 수천 냥 분량의 총기를 구입. 아키타케의 미토 입봉 선물로 헌상했다.

  시부사와는 시즈오카 호다이원宝台院에 근신중이었던 요시노부를 찾아뵙고 초췌해진 전직 쇼군의 모습에 낙루落淚하고 한탄했다 한다. 시부사와는 아키타케의 유럽 순회ㆍ유학 도중 있었던 일들을 요시노부에게 보고했다.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시대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徳川慶喜')


  며칠 후, 번청에서 그를 갑작스레 호출하여 "회계반장으로 일하라." 고 명령하였다. 시부사와는 미토의 아키타케에게 요시노부의 답장을 전해주어야 한다며 이를 사퇴했다.

  그러자 번청 공무원은 "미토에는 다른 사자를 보내도록 했으니 자네가 갈 필요는 없어. 번청에서도 필요해서 회계반장직을 맡으라는 거야. 시키는 대로 근무하는 게 좋아." 는 식으로 고압적으로 나왔다. 분개한 시부사와는 임명장을 집어 던지면서,

  "그렇다면 더욱 더 거절해야겠습니다. 제가 아키타케 공의 친서를 갖고 가려는 건, 직접 이 땅으로 오실 수 없어서 요시노부 공을 위로할 수 없는 그 분에게 (요시노부의) 건강과 상태를 세세히 알려드리기 위한 것으로, 이는 형제간의 일로서 당연한 정애情愛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 편지는 우리가 맡겠다. 자네는 그대로 여기서 근무하라, 고 하는 건, 너무나도 인정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고 격노한 후,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시즈오카 번 집정執政ㆍ오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는 이 소식을 듣고 "회계반장 취임 건은 요시노부 공께서 꺼내신 이야기로, 시부사와가 미토로 가면 반드시 아키타케가 중용할 것이니 미토 번 무사들의 시기가 집중되어 신변에 위험이 미칠지도 모른다, 는 걱정에서 말씀하신 이야기였네." 라고 시부사와를 설득했다.

  시부사와는 자신의 짧은 생각短慮과 실언失言을 깊이 뉘우치면서 요시노부에게 더욱 더 경애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나, 시즈오카 번 출사는 여전히 거절했다.

  시부사와에겐 "농업ㆍ상업에 종사하면서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싶다." 는 바람이 있었으나, 신정부는 시부사와의 재능을 놀려두려 하진 않았다.


  실업계의 지도자가 되다

  메이지 2년(1869) 10월, 시부사와는 대장성大蔵省 출사를 명 받아 의도치 않게 관계官界에 입성했으나, 낭중지추였을까. 연달아 개정안改正案을 제출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겨갔다.

  도량형 개정 / 조세제도 개정 / 역전법 개정 / 화폐제도ㆍ녹봉제 개혁 / 철도부설안 / 은행조례 / 페번치현 실행의 세부 제도 / 회계법 등의 조사에 그는 전력을 다했다.

  시부사와는 대장대보大蔵大輔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와 함께 국립은행国立銀行 창립 / 사립은행私立銀行 개업 등을 계획하고 그 지도를 맡았으나, 메이지 6년(1873) 5월 정부政府와 충돌한 이노우에를 따라 사직辭職했다.

  이후 실업계實業界에 적을 둔 지 60년, 그가 남긴 족적足跡은 너무나도 위대한 것이다.

  제일 국립은행第一国立銀行 / 오우지 제지王子製紙 / 오사카 방적大阪紡績 / 니혼 우선日本郵船 / 토요 기선東洋汽船 / 시테츠 니혼 철도私鉄日本鉄道 등등.. 그가 관여한 사업은 족히 500개가 넘는다. 그의 족적이 그대로 메이지 시대의 산업사가 되었다.

만년의 시부사와와 그 일가족들의 가족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渋沢栄一')
시부사와는 1931년 9월 이 사진을 찍은 후 2달 후에 임종했다.


  타이쇼 5년(1916), 경제계에서 완전히 손을 뗀 시부사와는 남은 생애를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그런 한편으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대은인大恩人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오명을 씻어주기 위해 전력을 경주하며《토쿠가와 요시노부 공 전기徳川慶喜公伝》《석몽회필기昔夢会筆記》편찬에 공을 들인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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