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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타케다 가문의 유산을 둘러싸고 (5)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5호(2002년 10월호) 52~67쪽의 기사인,《타케다 유령 쟁탈전武田遺領爭奪戰 ~ 카이ㆍ시나노 획득에 담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를 향한 포석 ~》을 번역한 것으로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582년 3월에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고, 그로부터 고작 3개월 후에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횡사하면서,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카이ㆍ시나노 두 지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토쿠가와ㆍ호죠ㆍ우에스기의 3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와카미코에서의 대진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는 코모로 성小諸城에 중신重臣 다이도우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를 배치한 후, 스와 씨와 합류하기 위해 시나노지信濃路를 남하했다. 4만 3천 여 호죠 군은 아시다에서 엔뇨교쟈役の行者1를 거쳐 다이몬 고개大門峠를 넘은 후, 8월 1일 카시와바라柏原에 도착했다.

  우지나오의 시나노 침공은 정예하다고 믿고 있던 오다 군織田軍을 코즈케上野 지방에서 격퇴하여 동일본 무사들의 면목을 만회한 후에 이어진 침공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사쿠 군을 탈취하자 그 기세를 지켜보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ㆍ스와 요리타다諏訪頼忠ㆍ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가 호죠 측으로 돌아섰다. 이렇게 시나노 중앙부를 제압한 우지나오는 군나이郡內에 있는 호죠 우지타다北条氏忠의 1만 군대와 함께 카이甲斐에 포진해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둘러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때 우지나오는 토쿠가와 군이 1만 명 정도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자군은 군나이의 우군友軍과 합치면 5만 명에 육박하니, 남북에서 협공挾擊하면 칸나 강神流川의 타키가와 군滝川軍과 마찬가지로 매우 쉽게 격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정세는 명백히 호죠 측에 유리한 상황으로 진행되어, 호죠 군 내부에선 낙관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8월 1일, 우지나오의 군대가 사쿠 가도를 통해 와카미코若神子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는 일단 타카시마 성高島城의 포위를 풀고 시라스까지 군을 물렸다. 그러나 8월 3일, 호죠 군이 카시와바라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들에 맞서기 위해 옷코츠(乙骨, 옷코토乙事)로 돌아왔다. 토쿠가와 군은 3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타다츠구는 호죠 군이 4만 3천여 대군이라는 정보를 얻지 못했던 모양이다.

호죠 우지나오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北条氏直')
아버지, 삼촌들, 중신들의 입김이 세서 당주이면서도 주도적인 활동이 힘들었다.


  한편 토쿠가와 군이 산 저편에 포진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우지나오는 토쿠가와 군을 포착격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보고, 전군에 출진을 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지나오에게 배속된 가로家老들이 "미사카 방면御坂口의 호죠 우지미츠北条氏光, 치치부 방면秩父口의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2와 호응하여 공격해야 일거에 적을 묻어버릴 수 있습니다." 라고 우지나오에게 간언했다. 이를 들은 우지나오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며 화를 냈으나, 가로들은 아무리 뭐라 해도 출진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 결과 토쿠가와 군이 철수하도록 내버려두고 말았다.

 《호죠키》에 기록된 일화로, 혈기 넘치는 젊은 우지나오와 그의 돌출突出을 억누르려 하는 완미頑迷한 노신들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으나, 기사 자체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구도는 당시 호죠 가문이 안고 있던 문제 그 자체였다. 이 문제는 결국 오다와라 전역小田原戦役까지 영향을 끼쳐 호죠 가문의 숨통을 틀어쥐는 결과가 나고 만다.

치쿠마쇼보에서 출간한《현대어역 미카와 이야기》문고본 커버
(출처 : 일본 아마존 '三河物語' 검색)


  사카이 타다츠구는 호죠 군이 10배 이상의 대군이라는 걸 파악한 후, 이들에게 포착당하기 전에 옷코츠를 떠나 신푸 성新府城으로 퇴각했다. 후미부대殿 1번대는 오카베 마사츠나岡部正綱 / 2번대는 아나야마 집단穴山衆 / 3번대가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 4번대 혼다 야스타카本多康孝 / 5번대 이시카와 야스미치石川康通 / 6번대는 오오스카 야스타카大須賀康高였다. 토쿠가와 군의 철수를 알아챈 호죠 군은 이들을 뒤쫓았으나 전투에 능한 토쿠가와 군이 화승총鉄砲을 구사한 절묘한 철수전을 벌이면서 그들을 도중에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이때의 모습을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彦左衛門은《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3천 군대가 4만 3천 명의 병력에 추격당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전사자도 내지 않은 건 오늘날에도 옛날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 】면서 말이다.

  이 추격전의 실패는 호죠 측에겐 커다란 실책이 되었다. 만약 여기서 토쿠가와 군을 포착섬멸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 승리의 소식捷報은 카이甲ㆍ시나노信 지방의 정세를 일변시켜 버릴 가능성이 있었기 떄문이다. 코슈甲州의 무사들이 이에야스에게 기대를 걸었던 건 그만큼 토쿠가와 군이 정예精強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으로, 그들은 신겐信玄 시대부터 토쿠가와 군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기에 이에야스의 요리키与力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토쿠가와 군이 호죠 군에 패배하는 일이 생겼다면 카이 지방에서 이에야스에 대한 신뢰는 일거에 와해瓦解되었을 것이다. 거기다 옷코츠에 있던 토쿠가와 군은 3천 명. 이들을 야전에서 포착섬멸하였다면 이후 호죠 군의 발을 묶게 된 신푸 성의 토쿠가와 병력은 대폭 감쇄減殺되어, 어쩌면 신푸 성의 방비가 철저하지 못한 틈을 타 일거에 돌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공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우지나오의 판단은 정확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호죠 측은 이 건이 그 정도로 중대한 실책이라곤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며, "호죠의 대군을 본 토쿠가와 군이 도망쳤다." 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코후 역 남쪽 입구 부근의 타케다 신겐 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武田信玄')


  토쿠가와 군을 놓치고 만 호죠 군은 토쿠가와 군이 신푸 성에 입성한 것을 확인하고 추격을 중지, 와카미코 성에 포진했다. 8월 6일의 일이었다. 와카미코는 카이 겐지甲斐源氏가 발흥한 땅發祥地으로, 과거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영지 곳곳에 빙 둘러 건축하였던 봉화망烽火網의 중심지이자 호우미치(棒道, 역주 : 타케다 신겐이 깔아놓은 군용도로軍用道路)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카이ㆍ시나노 경영의 요충지를 장악하였다는 말이 되나, 일은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다.

  호죠 군의 와카미코 도착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8월 8일, 코후츄를 출발해 신푸 성에 입성, 5~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정찰에 나섰다. 적극적인 행동이라 하겠다. 8월 10일에는 코후츄에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 / 마츠다이라 키요무네松平清宗 / 미즈노 카츠나리水野勝成 / 미야케 야스사다三宅康貞를 남겨 군나이ㆍ치치부의 호죠 군에 대비케 하고, 이에야스 본인은 신푸 성에 입성해 이곳에 본진本陣을 두었다.「와카미코 대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야스가 본진으로 삼은 신푸 성은 멸망당하기 직전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가 새로운 본거지로 삼기 위해 텐쇼 9년(1581)에 축조한 성이었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설계한 요새要害였으나 카츠요리는 싸워보지도 않고 이 성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스와 방면에서 들어오는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카이 방어의 거점으로서 신푸 성의 가치를 인정, 이곳을 본진으로 삼은 것이다. 신푸 성에 포진한 토쿠가와 군의 병력은 8천 명이었다고 한다. 호죠 군은 5배가 넘는 병력적 우세에 있었으나 이에야스는 우세한 호죠 군을 상대로 신푸 성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에야스의 카이 방어전술이 명확해졌다. 신푸 성에서 호죠 주력을 막아내면서 내선內線의 이利를 살려 다른 방면에서 침입해오려 하는 다른 호죠 군을 요격한다는 것이었다. 신푸 성이 위치한 니라사키韮崎의 카마나시 강변釜無川沿い은 스와 방면에서 온 대군이 카이 지방으로 침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애로隘路였다. 호죠 군이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한 그보다 앞으로 진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신푸 성과 대치할 수 있는 최전선은 와카미코 성 뿐으로, 앞서 와카미코를 '카이ㆍ시나노 경영의 요충지' 라 했으나, 그것은 카이 지방을 제압한 후에야 비로소 요충이 되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한 그저 카이 침공의 교두보일 뿐이었다. 거기다 와카미코는 토쿠가와 편에 붙어버린 츠가네 집단津金衆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우지나오는 적지 한복판에 본진을 쳐 버린 셈이었다.

  8월 11일, 토쿠가와 군은 시오카와 강塩川 건너편에 '새로운 성新城' 을 축성하여 호죠 군의 진격에 대비했다. 우지나오가 "코후츄를 우려뺀 후, 군나이로 철수한다." 고 말했다는 정보를 호죠 측의 포로로부터 입수하였기 떄문이다. 우지나오는 신푸에 있는 토쿠가와 군을 유린한 후 코후츄에 들어가, 군나이를 거쳐 본 영지로 귀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인 12일, 이에야스는 호죠 측의 군대에게 포위당한 이나 군 이이다 성伊那郡飯田城의 시모죠 요리야스에게 편지를 보내 본인의 신푸 출진을 통고함과 동시에 이이다 구원을 약속하며, "호죠 군이 진격한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겠다." 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대진하던 호죠 측에서도 같은 날, 우지나오의 가신 타카기 타네노부高城胤信가 '와카미코 도착' 을 보고하며 "압도적인 병력차가 있으니만큼 승리는 금방이다." 는 뜻을 알리는 편지를 발신하였다. 그 수신자는 명확하지 않으나, 편지의 내용을 보자면 스와타이샤諏訪大社의 진쵸칸神長官 모리야 노부자네守矢信真에게 보낸 편지라 추정되고 있다. 양군 모두가 자군의 우세를 전하면서 결속을 다지려 한 것이다. 
      
  1. 나가노 현 나가토쵸長野県長門町의 후도 폭포不動の滝
  2. 기실 호죠 우지쿠니는 호죠 우지나오 진중에 있었다.


  쿠로고마 전투黒駒合戦

  카이를 포위한 호죠 군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와카미코에는 호죠 우지나오의 주력군 4만 3천, 군나이에 호죠 우지타다의 군대 1만, 카리사카 방면雁坂口에도 호죠 우지쿠니 휘하의 치치부 집단이 있었다.(병력은 명확하지 않음. 2천 명 정도?) 반면 카이 지방에 있던 토쿠가와 군의 병력은 모두 합쳐도 약 1만 1천 명 정도였다.

  호죠 군은 총합 5만 5천 명. 토쿠가와 군과의 전력비는 5:1이었다. 기본적으로 호죠 우지마사 이후 호죠 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적을 압도하는 정공법正攻法을 구사했으며, 무리한 싸움을 벌이는 일이 없었다. 이때도 호죠 씨는 그런 싸움의 이치에 따라 싸우려 했다. 병력의 우세에다, 기대하던 대로 와카미코와 군나이에서 협공 태세를 갖추고 있던 우지나오 입장에선, 이 시점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이 지방 내부에선 우지나오의 와카미코 도착에 호응한 공격이 실시되었다. 8월 9일, 무사시武蔵 지방의 카자마 마고자에몬風間孫左衛門이 2백여 기를 이끌고 카리사카 방면에서 침입, 마츠다이라 키요무네ㆍ나이토 노부나리内藤信成가 지키는 오오노 성채大野砦를 야습했다. 토쿠가와 측의 파수꾼 30여 명이 살해당했고, 남은 병력은 요새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때 토쿠가와 편에 선 타케다의 옛 신하遺臣 사에구사 토라요시三枝虎吉가 구원군으로 달려와 카츠누마勝沼에서 카자마 군을 포착, 카자마 마고자에몬의 사위 미사와 칸시로三澤勘四郎의 목을 베고 그 외 23명을 죽여 적군을 격퇴했다고 한다.

  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신푸에 본진을 치기 직전의 공세였는데, 이에야스 본인은 움직이지 않고 가신들에게 대응을 일임하였다. 이와 같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배후에 적을 둔 상태에서도 본진을 적의 코 앞까지 전진시킬 수 있었으리라.

파노라마대에서 촬영한 미사카 산지와 쇼지 호수(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御坂山地')


  이어서 8월 12일에는 군나이를 장악하고 있던 호죠 우지타다 / 우지미츠 / 우지카츠의 1만 군대가 미사카 성에서 출진, 코후츄를 향해 진격했다. 미사카 성은 미사카 고개御坂峠에 혼마루本丸를 두고 미사카 산御坂山의 산등성이를 따라 설계된 광대한 산성이었다. 호죠 군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코후츄의 토쿠가와 군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죠 군은 카마쿠라 가도를 남하하여 아즈마 군東郡의 쿠로누마에 들어선 후, 민가民家를 약탈할 목적으로 넓게 산개했다. 이 시점에 이미 군대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우지미츠의 군대는 카마나시 강어귀에까지 몰려가 토쿠가와 병사 2~30명을 죽인 후, 이치카와市川 근교까지 전진했다.

죠라쿠사가 소장한 토리이 모토타다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鳥居元忠')
이에야스에게 헌신한 인물로 그 후손들은 두 번이나 카이에키를 모면하는 음덕을 입었다.


  코후츄를 지키고 있던 토쿠가와 측의 대장 토리이 모토타다ㆍ마츠다이라 키요무네ㆍ미즈노 카츠나리ㆍ미야케 야스사다는 호죠 군의 카이 침공을 확인한 후, 2천 병력을 인솔하여 출진했다. 토쿠가와 군은 미카와 시대三河時代 이래의 정예부대였다.

  약탈에 여념이 없던 호죠 군은 사방에 분산되어 있었기에, 토쿠가와 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방어전도 치르지 못하고 궤란하여 미사카 성으로 패주했다. 토쿠가와 군은 패주하던 호죠 군을 쿠로고마에서 포착, 미사카로 가는 입구인 토우노키(当木, 藤野木)까지 추격하여 3백여 개의 수급을 베었다.

  미사카 성과 연결된 산길은 세 사람도 나란히 지나갈 수 없는 협소하고 가파른 험지였기에 호죠 군의 선봉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후진에 있던 자들부터 줄줄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호죠키》에 나온 기록인데, 필자가 직접 답사해 보니 토우노키에서 미사카로 이어진 길은 확실히 협소하고 가파랐다. 말을 탄 경우 1기一騎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면 병력의 많고 적음은 상쇄되어 버릴 것임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호죠 군의 전군이 산에서 모두 내려가지 못했을 가능성까지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리고, 토쿠가와 군이 취한 수급은 신푸 성에 있는 이에야스에게 보내졌다. 이에야스는 이 수급들을 성 밖에 효수했다. 와카미코에 포진하고 있던 우지나오 군은 그때까지 아군의 패배를 알지 못하다가, 효수당한 수급들 중에 지인과 친척의 머리들을 발견하고 놀라고 애통해하는 가운데 군나이 군의 패배를 체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쿠로고마 전투의 결과는 양군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토쿠가와 군은 호죠의 대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싸워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반대로 호죠 군은 적은 병력으로 다수를 제압한 토쿠가와의 정예부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쿠로고마 전투에서 패배한 군나이의 호죠 군은 이후 미사카 성에 틀어박혀 공세에 나서지 않았으니, 호죠 군의 카이 협공작전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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